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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23화

by 백서향

하슬라가 만든 디저트들은 인기가 좋았다. 특히 하에라는 오후 수업 중간에 나오는 디저트에 대한 기대감으로 수업 시간이 좋아지고 있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어머니, 주방 시녀장을 불러서 상을 내려야겠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겠니? 자기 할 일을 할 뿐인데."


"아니에요. 제 기분이 이렇게까지 좋아지는걸요."


"그럼 그렇게 하렴. 훌륭한 맛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으니."


그렇게 제나는 하에라의 응접실로 불러 왔다. 하슬라가 만든 음식들이었으나 그녀를 여기로 올라오게 할 수는 없었다. 얼룩이 잔뜩 묻은 앞치마를 벗어 털어놓고는 그나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2층으로 올라갔다.


"제나, 훌륭한 음식을 만들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어서 불렀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몇 달 사이에 훨씬 맛이 좋아졌잖아!"


"그저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가씨께서 맛있게 드셔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아니야. 제나가 내 기분을 좋게 했으니 상을 내려야겠지. 혹시 원하는 게 있어?"


이 사람들은 아랫사람들이 선뜻 대답 할 거라고 생각하고 질문을 하는 것일까? 제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막상 원하는 것을 말하면 저 사람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제나는 고개 숙여 인사라고 뒤돌아 나가려고 했다.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려던 힐조가 제나를 불러세웠다.


"그래도 그건 예의가 아니지. 말해보거라. 옷이나 신발은 어떨까?"


힐조는 제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쭈욱 훑어보았다.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 깨끗했지만, 낡은 원피스, 물 자국이 선명한 신발까지. 제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어졌다.


"그럼 깨끗한 외출복 한 벌 내려주십시오. 감사히 받겠습니다."


말을 마친 후 크게 인사를 한 제나는 서둘러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상대방의 약점을 기어코 찾아내서 짓밟아주어야 하는 여자. 제나는 더러워진 기분을 털어내려 애쓰며 주방으로 내려갔다.


"역시 어머니는 현명하세요. 제나의 옷이 낡긴 했더라고요. 제 의상 시녀를 불러 옷 한 벌 지어주라 해야겠네요."


"하에라, 이제 16살 생일이 되면 비를 내리는 의식을 치러야 할 것이야. 아버지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된다는 뜻이기도 한단다. 모두들 너를 그렇게 부르고 받들게 될 거야. 그러니 이제부터는 아랫사람에게 권위를 보여야 해. 지금처럼 그들이 너를 편하게 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 하슬라에게조차도."


"하지만 어머니, 하슬라는 제 자매이자 가장 친한 친구란 말이에요."


하에라는 거의 울상이 되어 힐조를 바라보았다.


"군주는 외로운 자리지만 가장 높은 자리이기도 해. 모든 것을 네 손안에 넣을 수 있는데 그까짓 하슬라가 중요하겠니?"


세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하에라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제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만큼 달콤한 것이 또 있을까. 한 입 크게 베에 물은 산딸기 타르트만큼이나 그녀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이었다.



기병대를 도열해 놓고 맨 앞에 자리 잡은 아란이 무들과 마주보고 서 있었다. 무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에라의 첫 번째 의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란은 아직도 경험도 없는 자신이 하에라의 호위를 맡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물어봐도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하슬라를 남기고 온 아란은 온통 신경이 정원으로 쏠려있었다. 늦은 일과를 끝내고 정원으로 달려가 보곤 했지만, 하슬라가 그곳에 있을리가 없었다. 대신 아란은 조심히 성벽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 성의 제일 끝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란은 숨죽이며 틈을 넓혀나갔다. 혹시나 하슬라가 제 방에서 나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란은 자작나무 숲길 옆 큰 느티나무 아래 흙을 다듬고 편편한 돌을 깔아 놓은 후 얹어놓으 후 테이블과 의자를 다시 가져다 놓았다. 집에서 쓰던 테이블보를 가져와 깔고 꽃이 수놓아진 쿠션도 받쳐놓으니 그럴싸해 보였다.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비를 막아줄 테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었다. 이제 하슬라만 와주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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