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네. 웬 여자 손님들이 이렇게나 많이 온다니?"
매디는 며칠째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퀴퀴한 냄새 나는 남정네들 대신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이 식당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아가씨들 여기가 뭐하는 덴 줄은 알고 있는 건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다가오는 매디를 보고 조금씩 눈치를 보던 여자들이 라온이 들어오자 일제히 숨을 멈추었다. 그제야 매디는 사태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라온이 밭일 때문에 식당에 들어오지 않던 그 며칠 동안 여기서 죽치고 기다렸다.
이 동네에서는 드물게 큰 키를 가지고 있던 라온이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굵어지는 목선과 각진 턱선이 두드러지고 옆으로 찢어진 눈에 쌍꺼풀이 생겨버렸다. 제멋대로 자라는 검은 머리가 성가신 라온이 매디에게 짧게 밀어달라고 했었지만, 그마저도 구리빛 피부에 잘 어울려 보였다.
매디의 식당에 잘생긴 점원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아무도 예전의 조그맣고 말랐던 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 번이라도 라온을 본 또래의 여자들이 식당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덕분에 식당 분위기가 바뀌었지만, 매디는 메뉴도 바꿔야 한다고 툴툴거렸다.
"어머니, 이제 당근은 다 뽑아서 정리해 놨고, 밭도 다 갈아 놓았으니, 배추를 심으면 되겠죠?"
굵은 목소리가 식당안에 크게 울렸다. 라온이 일부러 큰소리를 내고 있다는 건 10살짜리 어린아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 음식이나 날라. 바빠 죽겠구먼. 입 다물고 일해!"
매디가 라온을 째려보며 접시들을 밀어냈지만, 라온은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저녁 장사를 끝내고 매디는 팔을 주무르며 밖으로 나왔다. 라온 덕분에 장사도 잘되고 무례한 손님도 없어져서 일이 훨씬 수월해졌지만 이게 정말 좋은 일일까 싶었다. 괜히 라온이 헛바람이나 들지 않을지 걱정이었다.
식당 뒤편에 있던 텃밭은 이제 규모가 꽤 커져 있었다. 라온이 힘이 세지면서 놀고 있던 땅을 개간한 덕분이었다. 각종 채소를 심은 덕에 재료비를 많이 아낄 수 있었다. 내년 봄에는 과실 묘목을 사다 심어보자고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배추 모종을 심으러 나간 녀석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배추들은 가지런히 심겨 있었다. 시들시들해 보이는 토마토에 강물을 퍼다 줄까 했지만 매년 이맘때쯤 비가 내렸으니 일단은 기다려보기로 했다.
"하하하, 왜 이래요. 아이참."
여자의 웃음소리에 놀란 가슴을 부여잡은 매디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리는 창고 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매디는 주위에 있던 막대기를 하나 주워 들고는 살금살금 다가갔다.
"어머나, 깜짝이야. 뭐예요?"
여자아이는 놀라서 일어났고, 라온은 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매디는 화를 내는 대신에 라온을 한번 보고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우리 다음에 또 봐. 알았지?"
"알았어."
여자아이는 토라진 척 라온을 흘겨봤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라온은 그녀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 준 다음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예쁘잖아요. 제가 좋다던데요. 잠깐 얘기만 했어요."
라온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여자를 만나지 말라는 게 아니잖니. 사내가 연애도 하고 그러는 게 이치에 맞는 거야 내가 왜 모르겠어.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좋다는 사람 아무하고 손잡고 그럴거니? 너 그 애 이름은 알아?"
"아…… 이름을 안 물어봤네."
"누군지도 모르는데 덜컥 손부터 잡고 시시덕대고 있었던 거야?"
"아니, 뭐, 손에 뭐가 박혔다고 해서 그랬죠."
"하여튼 소문 안 나게 조심해. 바람둥이라고 소문나봤자 너한테 좋은 거 하나 없으니."
"다들 내가 좋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요!"
"너 어디서 바뀐 거 아니니? 예전에 소심하던 아이 맞아? 내가 너를 잘못 봤던 거냐고!"
매디의 끝은 항상 큰소리였다. 말하다가도 제 기분에 못이겨 결국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매디의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하던 라온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가만있고 싶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보기만 하다가 하나둘 잘생겼다며 말을 걸어왔다. 처음에는 쑥스러웠던 라온도 그들의 칭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봐도 잘생긴 얼굴에 취해버렸다. 더군다나 하루가 멀다고 여자들이 고백해 오고 있었다. 밭일과 식당 일을 하면서 그 여자들을 만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어 불만이 가득했던 차였다.
"나도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난생처음 매디에게 큰소리를 내게 된 라온은 자신이 더 크게 놀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라온은 매디가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매디가 따라가 방문이 부서질 듯 두드렸지만, 라온은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않고 있았다. 제풀에 지친 매디가 식당을 나갈 때까지.
매디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씩씩대며 시장으로 향했다. 주위가 껌껌해졌지만 상관없었다. 대장간까지 한달음에 도착한 그녀는 칼을 두드리고 있는 대장장이 옆에 주저앉았다. 대장장이는 그녀를 힐끔 쳐다볼 뿐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아니, 남자애들은 원래 그런 거야? 내가 그래도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여자 때문에 나한테 화를 내고 말이야!"
"왜 라온이 여자친구라도 생겼대? 그래서 질투라도 나는 거야? 흐흐."
"뭔 말을 그렇게 해? 누구 질투한대. 제대로 연애를 하면 몰라. 이 여자 저 여자 좋다고 헤벌쭉 해가 지고."
"이봐, 매디."
"왜!"
"자식 같던 라온이 이제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돼?"
퉁명스럽던 대장장이의 목소리가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었다.
"외롭던 사람 둘이서 의지하며 지내던 세월이 있는데 당연히 섭섭하겠지. 하지만 이제 16살이야. 한창 여자한테 관심도 두고 멋도 부리고 부모에게 반항도 할 나이라고. 나도 그랬고. 자네도 그랬잖아."
"내가 언제?!"
"일꾼으로 데리고 있는다더니 자식처럼 생각했었나 보네. 그럼, 자식처럼 대해줘. 무조건 화낼 게 아니라 제대로 연애하는 법도 가르치고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도 골라주고."
"그걸 내가 어떻게 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매디의 말에 힘이 빠져 있었다. 대장장이의 말처럼 라온을 잃을까 두려워 화가 났던 것이었을까? 둥지를 떠날 날만 기다리는 아기 새를 바라보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어쩌면 매디는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다만 막상 그 일이 닥치자 어찌할 바를 몰랐을 뿐.
"라온이 그냥 하는 대로 내버려둬. 저것도 그냥 한때야. 여자들이 저를 좋다고 쫓아다니는데 지금 하늘을 나는 기분일걸. 조금은 즐기게 나둬."
"그러다 나쁜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소문? 벌써 다 났는데. 매디의 식당에 잘생긴 직원이 있다. 그 직원이랑 데이트한 여자가 한둘이 아니더라. 흐흐."
"뭐? 알면서도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야?"
"매디, 이 시장에 라온이 착하고 성실한 청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앞으로도 그건 변하지 않 을테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해심 많은 엄마가 되어줘. 괜히 사이나 틀어지지 말고."
"어떻게 이 세상에 내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매디는 올 때보다 더 크게 화를 낸 뒤 대장간을 나갔다. 대장장이는 쇠질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저 감정이 오히려 매디를 살아가게 할 것이 분명했기에 대장장이는 걱정조차 되지 않았다.
매디는 여자 손님들이 들어올 때마다 눈으로 욕을 했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라온이 여자아이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킬 때마다 대장장이의 조언을 떠올리며 모른 척 돌아섰다.
'그래, 다 한때야. 언젠가 라온도 이곳을 떠나가겠지. 그때가 되면 웃으며 보내줄 수 있어야 할 텐데.'
매디의 라온에 대한 걱정은 생각보다 빨리 수그러들었다. 몇 주가 지나도록 비가 오지 않아 채소들이 말라가고 있었다. 강물을 퍼다 뿌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주위에 있는 밭 주인들이 서로 물을 가져가겠다, 하루가 멀다하고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매디는 하루를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작했다. 맑게 갠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생명의 신이 또 무슨 변덕을 부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라온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는 더 이상 여자들을 만나지 않았다. 온 도시가 다시 근심에 휩싸였다. 비가 오지 않을 때마다 겪어야 하는 이 일들이 너무 가혹하다고 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