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고 그 비를 맞으며 라온와 매디는 서로를 보며 한껏 웃었다. 그동안의 다툼이 무색해질 만큼.
"비가 내렸으니, 이번에는 나무를 심어볼까?"
"제가 시장에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그런데………."
"뭐? 저희 말과 마차를 좀 사도 되지 않을까요? 짐을 들고 다니기가 이젠 힘들어요."
매디는 라온을 향해 눈을 흘겼다. 속이 뻔히 보였지만 이번에는 져주기로 마음먹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매디도 이제 나이가 들어 예전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라. 대장장이한테 부탁하면 될 거야. 내가 시켰다고 꼭 전해. 네가 말하면 들어주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매디가 모르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라온과 대장장이가 꽤 가까운 사이였다.
라온은 시장에 갈 때마다 대장간에 들르곤 했다. 라온은 쇠질을 하는 그를 지켜만 보았고, 대장장이도 굳이 말을 시키지는 않았다. 라온이 겨울을 보내고 훌쩍 큰 키로 들렀던 그 날 대장장이는 이 아이에게 남자어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손에 쥐고 있던 붉게 달아오른 칼을 말없이 건네 보았다. 그 후로 라온은 매디에게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대장장이에게 하게 되었고, 라온은 매디만큼이나 그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아저씨! 왜 어머니한테 고백하지 않으세요?"
하마터면 대장장이는 들고 있던 망치를 발등에 떨어뜨릴 뻔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망치질 하던 그에게 라온이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서로 호감이 있는데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저처럼 일단 만나보고 생각하시라니까요."
대장장이는 순간 망치로 저 입을 내려칠까 망설였다. 왜 매디가 열을 냈는지 알것도 같았다. 들고 있던 망치를 제자리에 놓아둔 대장장이가 라온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아저씨, 말은요? 마차는요?"
대답 대신 길 끝을 가리킨 그는 문을 닫고는 반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걸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란다. 이 녀석아!'
말과 마차를 한창 고르고 있는 라온을 뒤로 하고 대장장이가 향한 곳은 매디의 식당이었다. 매디의 식당에는 마구간이 없었다.
'말을 살 생각이었으면 마굿간부터 만들어놔야지. 생각들이 없어.'
자기 말에 싣고 온 연장을 내리면서도 구해 온 나무들로 마구간을 만들어 놓으면서도 대장장이는 속으로만 툴툴거릴 뿐 입 밖으로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매디도 마찬가지였다. 때가 되면 식사를 준비해 주고 물을 가져다 주면서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일부러 대장장이에게 라온을 보낸 건지도 몰랐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저녁 늦게 초췌한 모습으로 라온이 도착했을 때는 매디가 지푸라기를 잔뜩 들고 마구간 바닥에 까는 중이었다. 그제야 라온은 식당에 마구간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이 빠진 라온은 말을 매어놓고 먹이를 준 후 그대로 뻗어버렸다. 마차는 사 오지도 못했고 구해온 과실 수 묘목은 널브러져 있었다.
매디와 대장장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라온은 이미 잔소리를 한 바가지 들은 기분이었다.
다음 날 말똥 냄새에 잠이 깬 라온은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굳이 깨우지 않고 여기서 자게 놔둔 매디와 마구간을 만들러 간다는 소리 없이 혼자 가버린 대장장이가 원망스러워 괜히 지푸라기를 잡아 뜯었다. 따지고 보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나섰던 자신 잘못이지만 라온은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라온은 매디에게 따질 작정으로 한껏 벼르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지만, 매디는 코를 쥐며 씻고 들어오라며 밖으로 서둘러 내보냈다.
"어디서 냄새가 난다고!"
윗옷을 들어 코로 가져간 라온은 헛구역질하며 강가로 달려갔다. 서둘러 옷을 벗어 물어 담가버린 후에야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단은 냄새를 없애는 게 우선이었다. 버드나무 아래 돌 틈에 숨겨놓았던 비누를 꺼내 온몸을 힘껏 문질렀다. 옷이 닳도록 비벼 빤 후 냄새가 나는지 재차 확인한 후에야 나무에 옷을 널어놓았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식당까지 뛰어가려는 찰나 라온의 눈에 바위 위에 놓인 옷이 보였다. 매디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려 벼르고 있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고마워요. 어머니."
식당 안으로 들어온 라온은 매디와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라온! 어서 장사 준비해야지."
"어제 가져온 나무를 먼저 심어야 할 것 같은데요."
매디는 대답 대신 창밖을 가리켰다. 마구간 쪽 빈터에 나무가 정렬되어 있었다.
'아무리 네가 그래봤자 내 손바닥 안이다.'
매디는 속으로 장난스럽게 웃었다. 대장장이 말이 맞았다. 저러는 것도 다 한때였다. 그러면서 다 크는 거지. 자신이 할 일은 그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날부터 라온은 말을 길들이고 타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 주변을 돌다 시장에 오가는 정도가 되었다. 원래 말을 사면 여자친구들을 태우고 다닐 생각이었다. 그래서 크고 잘생긴 말을 고르고 골랐던 것이다. 하지만 라온은 말타기가 익숙해지자 제일 먼저 매디를 태우고 마을을 크게 돌았다. 라온은 자신이 괜한 객기를 부린다는 것도 매디가 화를 내면서도 못 이기는 척 다 받아준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감사하다고요!"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라온의 등에 기댔던 매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말 라온이 자기 아들이 된 것만 같아 눈물이 맺혔다.
매디가 집으로 돌아가고 마구간을 정리하던 라온이 갑자기 말 위에 올라탔다.
"오늘 힘들었겠지만, 한번만 더 수고해 줘."
말을 정성스럽게 쓰다듬은 라온은 어두운 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가본 게 언제지도 모를 그 길이 마치 어제 갔었던 것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여전히 이리저리 엉킨 덩굴이 크게 자라 있었다. 나무에 말을 매어놓은 라온이 손을 더듬어 구멍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오래되긴 했지. 덩굴도 새로 자랐을 것이고. 그래도 한번은 보고 싶었는데. 하슬라…… 잘 지내고 있겠지. 그래, 만난다 해도 나를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라온은 씁쓸히 웃으며 커다란 덩굴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잊고 살아온 게 아니었다. 기억 저편에 잠시 묻어두고 있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