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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18화

by 백서향

얼었던 땅이 촉촉해지면서 연두색 새싹들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겨울이 되기 전 뿌려놓았던 보리와 밀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 자라만 준다면 올여름과 가을은 배곯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강물은 넘쳐 흘렀고, 물고기들도 심심찮게 잡히고 있었다. 하지만 날이 따뜻해져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던 인간들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또다시 가뭄이 시작되면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각종 채소를 심을 시기가 오기 전에 비가 한 번이라도 더 내려야 했다.


라온은 식당문을 열기 전 창고에 들러 채소 씨앗들을 점검해 보았다. 비가 내리면 언제든지 씨앗을 뿌려야 했기에 씨앗들이 썩지는 않았는지 쥐들이 먹지는 않았는지 자주 확인해 봐야 했다.


"라온."


주방에서 큰 소리로 라온을 부르던 매디는 검은 그림자를 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매일 보는 라온이었지만 요즘은 볼 때마다 새로웠다. 작고 마른 라온에 익숙해져 있던 매디는 훌쩍 커버린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목소리도 제법 굵어지고 목울대도 크게 튀어나왔다. 한 손에 잡히던 어깨는 이제 가마니를 얹어놓아도 미끄러지지 않을 만큼 넓어져 있었다. 가늘고 힘없던 머리카락은 갈색 곱슬머리로 변해버렸고 햇빛에 그을린 구리빛 피부는 진하다 못해 번들거리며 빛났다. 16살 생일을 앞두고 있던 라온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예전에 심부름하던 꼬맹이는 이제 없나 봐."


그런 소리를 들을때마다 매디를 턱짓으로 라온을 가리켰고 열이면 열 놀래는 시늉을 하곤 했다. 더군다나 굵은 목에 각진 턱선이 두드러지고 쌍꺼풀 없는 옆으로 긴 눈과 높아진 코 덕분에 잘생겨졌다는 칭찬도 자동으로 따라왔다.


봄이 되면서 가게 분위기도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잘 씻지도 않으면서 겨우내 죽치고 있던 농부들 때문에 퀴퀴해졌던 식당이 그들이 바쁘다며 오지 않게 되자 한결 밝아졌다. 그들 때문에 가게 문을 닫아버리고 싶기까지 했던 매디는 업종을 바꿀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 아저씨들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살았잖아요."


"넌 저것들 술 먹고 주정하는 거 지겹지도 않니? 널 살살 건드리는 것도 꼴 보기 싫고. 안주는 뭘 그리 처먹는지. 얼굴을 접시에 담가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었는 줄 아니."


"이젠 적응돼서 괜찮은 것 같기도 해요. 뭐, 이젠 절 건드릴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라온은 농사일로 더 단단해진 제 몸을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소심하고 눈치를 많이 보던 작은 아이가 제 몸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성격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어른들이 놀리는 소리도 천연덕스럽게 넘길 줄도 알았고 손찌검이라도 하려고 할 때면 제 손으로 지그시 눌러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화를 내지도 큰소리를 내지도 않고 그저 빙긋이 웃으면서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곤 했다.


"어머니 땔감 더 필요하시죠? 제가 가져올게요."


'저 녀석. 능글맞아졌단 말이야.'


퍽.


커진 키에 적응 못 하기는 라온도 마찬가지여서 식당 문을 열고 나설 때마다 이마를 부딪치고는 했다. 라온은 바보처럼 매디를 향해 괜찮다고 웃어 보이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봄볕이 하루가 다르게 따가워지고 있었다. 산에서 굵은 나무들을 지고 내려온 라온은 땀으로 목욕 하고 있었다. 늘어진 윗옷은 떨어진 수피로 얼룩져 있었다. 매디의 잔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라온은 진저리 치며 윗옷을 훌렁 벗었다. 따로 운동을 한 건 아니었지만 농사일에 짐꾼 노릇까지 하자 자연스럽게 잔근육이 잡혀있었다. 윗옷을 가지고 강가로 내려간 라온은 때가 질 때까지 비벼 빨고는 나뭇가지에 널어놓았다. 날이 좋으니, 저녁까지는 마를 것 같았다. 라온은 윗옷을 벗은 김에 강물로 대충 씻은 후 도끼를 들고 나무를 패기 시작했다.


도끼로 내리찍을 때마다 나무가 쩍쩍 갈라졌다. 비가 오지 않아 나무들이 잘 말라 있었다. 힘 조절에 실패한 나무들이 멀리까지 날아가는 바람에 이리저리 뛰게 된 라온의 몸이 금세 땀으로 뒤덮였다.


매디가 힐긋힐긋 창문으로 볼 때마다 라온은 장작을 패고 또 패고 있었다. 저 정도 양이면 한달은 문제 없겠다싶었는데 왜 저러고 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온, 인제 그만 들어와서 점심 장사 준비하자!"


매디의 말에 라온은 얼굴을 찡그리며 마지못해 도끼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장작을 정리했다.


"강에 내려가서 씻고 들어갈게요."


일부러 큰소리를 내는 녀석이 이상해서 문을 열고 나온 매디는 그제야 주위에 지나다니는 또래들이 많다는 걸 눈치챘다. 여자아이들이 라온을 힐끔힐끔 보며 지나가는 걸 꽤나 의식했던 모양이었다. 라온도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매디는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자신에게는 그저 작은 꼬마일 줄로만 알았는데 갑자기 너무 커버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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