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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16화

by 백서향

하슬라가 첼로를 켜다 현을 모조리 끊어버렸던 날, 음악 교사는 도저히 가르치지 못하겠다며 성을 나가버렸다. 피아노를 겨우 칠 수 있게 가르쳤던 교사는 첼로를 권했던 자기 자신에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냥 편하게 피아노만 치면 될 것을. 괜히 첼로는 꺼내서 기어코 사표를 던지고는 뛰쳐나가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이제 새로운 교사가 올 테지만 하슬라가 잘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 않을 사람이어야 했다.



아란이 야간 산행 훈련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조상신들을 모시는 제단으로 가는 길을 처음으로 올라봤다. 말을 타고 가다가 산 중턱에 이르러서부터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형지물을 눈감고도 떠올릴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무들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 말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훈련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기병대와 성으로 돌아온 무들은 아란에게 집으로 먼저 돌아가라 말하고는 폐하의 집무실로 향했다. 말을 토닥여 준 아란은 성 밖으로 향하는 대신 3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모두 잠들었는지 성안이 고요했다.


작은 소리라도 날까 싶어 벽을 어깨로 조심히 밀었다. 조금씩 밀려 들어오던 바람이 아란의 땀을 식혀주었다. 정원이 어두컴컴할 것이라는 아란의 예상과는 달리 희미하게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디에서인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란은 곧장 그 불빛이 나오는 곳으로 향했다.


자작나무 사이로 작은 불꽃들이 악보를 그리듯 하나둘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란은 그 불꽃들을 손으로 건드려보았지만 뜨거운 기운이 없었다. 부드러운 바람 사이를 가르며 자작나무 숲 끝에 이르자 마치 폭풍우가 치기 전날의 노을빛처럼 진한 보랏빛이 시냇물 위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슬라가 불꽃을 제 손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란은 하슬라가 놀랄까 싶어 멀찍이 떨어져 그녀를 보고 있었다. 손에서 물결치듯 흘러나오는 불빛은 하슬라의 보라색 머리카락과 닮아 있었다. 하슬라가 그것들을 시내 반대편으로 보내면 불빛들이 그곳에서 한참을 흘러 다니다 사그라들었다.


아란은 홀린 듯이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행복한 미소를 짓던 아란이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하슬라가 옆에 앉아 있었다.


"놀라지 않았어?"


하슬라는 아란을 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물었다.


"아니. 너무 아름다워서 넋 놓고 보고 있었어. 힘든 하루의 끝에 받은 선물 같았어."


웃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하슬라는 그대로 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아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하슬라의 시간을 방해한 것이었나, 아니면 하슬라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인가.


"그렇게 안절부절못할 것 없어. 힘들어서 그런 것뿐이야. 오늘은 음악 교사가 나 때문에 그만뒀거든."


"죄송하다고 말해보면 어떨까?"


"뭐라고? 하하하. 능력도 없는 아이에게 억지로 악기를 가르쳤는데 그게 맘대로 되지 않으니 제풀에 화가 나서 나가버린 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아……."


하슬라의 반응은 아란의 예상을 한참이나 빗나가 있었다.


"어차피 새로운 교사가 와도 똑같을 텐데."


"하기 싫다고 말해 본 적은 있어?"


"난 하기 싫다는 말을 해서는 안돼. 그랬다간 왕후께서 나를 가만두지 않으실 테니."


아란은 말을 꺼내 놓고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정작 본인은 아버지에게 싫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앞으로 할 생각도 없지 않은가.


"하고 싶은 일이나 해보고 싶었던 건?"


"음……. 제나랑 요리하는 게 재미있어. 빵을 만드는게 좋아. 내가 원하는 대로 결과물이 나오잖아."


하슬라는 그제야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손에서 불빛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크고 환한 보라빛이었다.


"넌? 넌 지금 하는 일이 좋아?"


"내가 하는 일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일이라 하기 싫다고 안 할 수는 없어."


"너도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구나."


"난 책이 좋아. 새로운 지식을 알아가는 게 좋고."


"나랑 반대네. 흐흐흐."


하슬라는 시내 건너로 보내던 불빛들을 아란에게 조금씩 내보냈다. 별빛처럼 반짝이는 보라색 불빛들이 어느새 아란을 감쌌다. 당황한 아란이 일어나려 했지만, 하슬라는 담요를 덮어주듯 아란을 불빛으로 감싸주었다. 그제서야 안심한 아란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하슬라도 아란의 미소를 보며 오랜만에 편안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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