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내 책에 네가……."
"아, 그거 내가 해놨어."
하슬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란이 뿌듯해하며 대답했다.
"다음부터는 손대지 마. 너 때문에 더 혼났잖아."
하슬라의 공책을 본 가정교사는 스스로 풀었을 리 없다며 평소보다 더 많은 화를 냈다. 차라리 안 해가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간절하게 드는 시간이었다.
"뭐! 기껏 해줬더니 너무하는 거 아니야!"
"하여튼 다시는 그러지 마."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 한다는 생각이 든 하슬라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너 전혀 문제를 풀지 못하던데. 원한다면 내가 가르쳐줄 수 있어. 그러면 내가 대신 해주는 건 아닌 거잖아. 안 그래?"
"싫어!"
이미 마음이 상한 하슬라는 단번에 거절 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속으로는 아란이 한 번만 더 물어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기분이 상하기는 아란도 마찬가지여서 씩씩거리며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 가져온 책을 펼쳤다.
둘은 각자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은 서로에게 쏠려있었다. 작은 소리라도 나면 차마 돌아보지는 못하고 몸만 움찔거렸다. 더 이상 안되겠다 싶던 아란이 먼저 정원을 빠져나갔고, 하슬라는 신경질적으로 책을 넘겼다.
"아가씨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제나가 조리대 위에 팔베개를 하고 엎드려 있는 하슬라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하슬라는 한숨만 푹푹 쉬고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 오늘은 같이 디저트를 만들어봐요. 폐하께서 밤늦게 업무를 보실 때면 가끔씩 블루베리를 넣은 머핀을 찾으시거든요."
제나는 일부러 소리 나게 밀가루와 계란을 올려놓았다. 그래도 하슬라는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계란을 깨서 양푼에 가득 담고 밀가루를 채 쳐 놓고는 버터를 가지러 간 사이에 잠깐 고개를 들어보았지만,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이거 계란이랑 녹인 버터랑 열심히 젓고 계세요."
보다 못한 제나가 반강제로 하슬라 손에 거품기를 쥐여 주었다. 하슬라는 마지못해 일어나 거품기를 들어 계란에 풍덩 넣었다. 손은 열심히 반죽을 젓고 있었지만,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게 보였다.
"아가씨 누구한테 잘못한 일 있어요? 꼭 사과해야 하는데 하기 싫은 얼굴이네."
그제야 하슬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속 마음이 무겁고 안 좋았던 이유를 제나가 콕 집어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반죽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이 머핀이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계란과 버터가 잘 섞이자, 설탕을 넣고 녹였다. 밀가루를 넣어 완성된 반죽을 틀어 덜고는 설탕에 조린 블루베리를 얹어 오븐에 넣었다.
"폐하께서 머핀을 좋아하셔?"
"그럼요. 안 어울리시게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세요."
"나랑 똑같네."
하슬라는 부풀어 오르는 머핀을 보며 맛있게 먹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제나."
하슬라는 손에 머핀이 든 봉투를 쥐고는 제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제나가 제 엄마였으면 하면서.
"자, 이거 먹어."
하슬라가 자작나무를 지나 아란이 앉아 있는 시내 앞까지 천천히 걸어왔다. 낙엽 밟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 덕분에 아란은 하슬라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 척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거 먹으라고."
눈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봉투 때문에 아란은 책을 놓쳤지만, 자신도 모르게 봉투를 낚아채고 말았다. 책을 주워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그위에 봉투를 펼친 아란은 달콤한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하슬라는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면서 의기양양해 했다.
머핀을 하나 집어 든 아란이 하슬라를 슬쩍 쳐다보았다. 머핀을 보며 침을 삼키는 걸 보니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란은 머핀을 하나 내어주고는 다른 하나를 잡아 입에 넣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그럼, 제나가 만든 빵인걸."
빵부스러기가 입가 묻고 손에 묻었지만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아 없어지는 머핀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너 지금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
하슬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 말대로 나를 가르쳐줬으면 좋겠어. 선생님께 혼나는 것도 지겹고 폐하께도 너무 죄송해서."
"맨입으로?"
"야! 내가 머핀도 주고 여기에 들어오게 해줬잖아!"
하슬라는 얼굴이 씨뻘게지며 펄쩍 뛰어올랐다. 아란은 미소를 띤 채 그런 하슬라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제야 아란이 장난 친 줄 알았던 하슬라가 슬며시 아란의 옆에 앉았다.
"그런데 이름이 뭐야?"
"하슬라."
"아, 하에라가 자랑했었어. 자매가 생겼다고. 그게 바로 너구나."
"응, 넌 아란이지? 그날 하에라가 널 그렇게 부르던데."
"맞아. 너도 아란이라고 불러도 돼."
하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내로 내려가 손과 입을 닦았다. 차가운 물이 살에 닿자, 몸서리가 쳐졌다. 물에 비친 구름이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에서 하얀 솜뭉치 같은 게 떨어지고 있었다. 하슬라는 회색으로 변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손이 저절로 하늘을 향해 나갔다. 보송한 얼음이 손에 닿자, 물방울이 맺혔고 미처 녹지 못한 얼음이 저마다의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이게 눈이구나.'
하슬라에게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눈이었다. 책에서 보던 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하얀 눈발이 점점이 내려오던 그림과는 달리, 제멋대로 생긴 민들레 씨앗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땅에 닿았던 눈이 녹아서 얼룩이 졌다. 하지만 이내 소복이 쌓이기 시작한 눈은 하슬라의 상상속에서 보던 그것과 같아지고 있었다.
어느새 눈이 들판을 뒤덮고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채워졌다. 눈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튕겨져 눈을 떨어내고 있었다. 한바탕 쏟아낸 눈구름이 물러나자, 거짓말처럼 해가 비추기 시작했다. 미처 떨어지지 못한 사과에 쌓인 눈이 그 빛에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 하슬라는 그게 보석보다 아 답다고 생각했다.
퍽.
"아!"
하슬라의 등에 눈덩이가 날아들었다. 아란이 서너 개의 눈덩이를 들고 계속해서 던지며 다가오고 있었다. 하슬라도 이를 악물며 눈덩이를 뭉쳐서 아란을 향해 던졌다. 아란은 하슬라가 큰 눈덩이를 던져오자, 반대편으로 도망쳐서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된 눈싸움은 눈이 다 녹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와, 너 진짜 대단하다. 공부는 못하는데 이런건 잘하네?"
"뭐? 지금 해보자는 거지?"
하슬라는 남은 눈을 긁어모아 아란을 향해 퍼부었다. 아란은 옷이 젖은 김에 눈이 쌓인 바닥에 누워 버렸다.
"그렇게 하면 좋아?"
"응. 엄청 푹신하고 좋아. 내 침대에 누워있는 것보다 더 포근해."
"그렇다면 나도."
하슬라는 아란 옆에 조심히 누워보았다. 차가운 기운에 몸이 으슬으슬해졌지만 이내 따스함이 스며들었다.
"진짜네. 따뜻해지고 있어. 신기해."
아란은 고개만 돌려서 하슬라를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그리고 생각했다. 이곳에서만큼은 웃고 또 웃을 수 있는 일만 생기기를.
눈이 녹은 땅은 겨울바람에 금방 얼어붙어 버렸다. 정원으로 나가 시간을 보내기에는 추운 겨울이 계속되었다.
추운 겨울이 싫다던 하에라가 땅에 온기를 불어넣자고 바론에게 졸랐지만, 그는 겨울을 온전히 보내야지만 봄이 올 수 있다는 말로 하에라를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