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온 아란은 벽에서 나온 여자아이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란은 평소와는 달리 무들이 밖으로 나오기 전부터 마구간 앞에 서 있었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만약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계속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아란에게는 시간이 넘쳐흘렀다.
무들은 기대에 차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잠시 놀라는 듯했지만 표정은 감췄다. 이제서야 자기 뜻에 따르기 시작한 아란이 대견해지는 순간이었다.
기병장을 나설 기회를 엿보던 아란은 무들이 폐하를 뵈러 가려 나서자마자 어제의 그곳으로 달려갔다.
'여기구나.'
복도 끝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틈이 있었다. 그 틈을 중심으로 손바닥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밀어보기도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아래쪽에서 바람이 느껴지자 몸을 조금 낮춰서 등으로 벽을 밀어보았다. 벽이 밀려들어 가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게 된 아란은 열린 문틈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았다. 아래로 이어져 있는 계단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어제 그 아이가 나온 것을 보면 위험한 곳은 아닐 것 같았다. 아란은 몸을 일으켜 문으로 나간 후 다시 벽을 제자리로 밀어놓았다.
숨을 한껏 쉬어 올린 후 계단을 내려가던 아란은 너른 들판과 반짝이는 과실수를 보고는 하슬라가 그랬던 것처럼 감탄했다.
'와, 성안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아란은 과실수를 뒤로하고 곧바로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자기 집에 있는 정돈된 나무들보다 거칠고 아무렇게나 자라있는 나무들이 훨씬 멋져 보였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숲 끝에 다다르자, 아란은 왜 그 아이가 여기를 감추고 싶어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자신이라도 이곳을 혼자만 알고 싶었을 것 같았다.
아란은 돌 틈 사이로 흘러 내려가는 물소리를 들으며 넋 놓고 시냇물을 보고 있었다. 물 위에 작은 원들이 생기면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순간 아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금새 굵어진 빗방울이 아란의 머리와 어깨를 적시고 있었지만 그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버지의 힘이 닿지 않는 유일한 곳이다.'
아란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편안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신발 안까지 모조리 흠뻑 젖었지만, 아란은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뺨을 적시고 있던 것이 제 눈물인지도 몰랐다.
하슬라는 비에 흠뻑 젖은 아란을 보고 놀라는 대신 인상을 구겼다. 하필이면 그곳에서 나오는 아란을 딱 마주쳤던 것이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팔짱을 끼고 일부러 삐딱하게 서서 쏘아붙이는 여자아이를 보자 아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어제는 당황해서 밀렸지만 작고 말라서 힘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이 작은 강아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네 것도 아니잖아."
하슬라는 그대로 지나쳐 가려는 아란의 팔을 잡았다.
"그렇다고 네가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되는 곳도 아니야."
어제와는 달리 강하게 말하는 남자아이의 말에 하슬라는 성급히 덧붙였다.
"누구한테 말한 거…… 아니겠지?"
"말했다면?"
하슬라는 아란의 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이 성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뺏겼다는 낭패감이 밀려왔다. 하에라가 제 방 드나들듯 아무 때나 열어 젖히는 자신의 방도 하슬라만의 것은 아니었다.
하슬라의 눈이 빨갛게 변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 입도 실룩대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차 싶었던 아란이 태도를 바꿔 재빨리 두 손을 흔들며 아니라고 했다.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네가 너무 나를 몰아세우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마. 응?"
"진짜지?"
하슬라는 결국 눈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아란은 순간 너무 미안해져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기 오지 않겠다는 약속은 못 하겠어."
"넌 원하면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잖아. 너만의 정원을 갖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 도대체 왜 여기를 오겠다는 거야?"
"아마 너랑 같지 않을까?"
하슬라는 아란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체념한 듯 뒤돌았다.
"나 그러면 여기 와도 되는 거지? 올거라고!"
힘없이 뒤돌아 가던 하슬라가 갑자기 아란에게 뛰어오는 바람에 아란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절대 하에라한테는 말하면 안 돼. 알았지? '꼭'이야!"
하슬라는 아란이 자신의 정원에 오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날 그의 눈을 보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하슬라가 올 때마다 아란이 오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낮잠을 자거나 밀린 숙제를 하면 그는 자작나무숲 시내 근처에서 책을 보곤 했다.
날이 쌀쌀해지고 있었다. 푸른 잎들이 말라가면서 울긋불긋하게 변해갔다. 입에서 입김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두터운 겉옷을 입으면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자작나무 잎들도 더 이상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지 못하고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잎들이 춤추듯 출렁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또 한 번 세차게 불어온 바람에 나무에 매달려 있던 잎들이 한 번에 땅 위로 떨어졌다. 왠지 저 위를 걸어가면 바스락 소리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 하던 찰나, 나뭇잎들이 없어진 나무 사이로 아란의 모습이 보였다.
아란은 책에 집중해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낙엽이 날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귀뒤로 넘겨놓은 금발이 바람에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책을 읽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왠지 하슬라는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에도 저 아이는 같은 곳에서 책을 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아란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하슬라는 자신의 모습을 들키기라도 할까 싶어 벌떡 일어나 급하게 성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나서야 왜 그렇게 급하게 나왔는지 어리둥절해졌다.
'아차, 책이랑 공책을 모두 놓고 왔네.'
책을 다시 가지러 가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가정교사의 무서운 얼굴도 떠올랐다. 숙제를 내일까지 해가지 않으면 어떤 벌이 기다리고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차피 숙제를 다 해가도 다시 해야 하는데 왜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슬라는 기운 없이 방문을 열다 멈칫했다. 방문 끝에 무언가 걸렸다.
"어? 내 책이잖아. 공책도 있네."
방문 끝에 걸려있던 책을 빼내어 들고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슬라는 책을 책상 위에 던져놓고는 공책을 펼쳤다. 풀다 만 문제들이 모두 풀려 있었다.
'설마, 그 아이가?'
자신이 잠결에 문제를 풀어놓지 않는 이상 아란의 짓이 분명했다. 하슬라는 이걸 좋아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