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살이 된 하슬라는 여전히 하에라의 놀이 상대가 되어 주었고 따라가지도 못하는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날도 가정교사가 낸 시험을 하나도 맞추지 못해 한바탕 혼나고 나오던 길이었다. 하슬라는 그런 날이면 자연스럽게 정원으로 내려가곤 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자작나무를 뒤로 하고 시내를 건넌 하슬라는 그대로 땅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버드나무가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며 시냇물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와그작, 사과 깨무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놀라지 않았다. 대신 순식간에 먹어버린 사과의 꽁다리를 멀리 던지고는 그대로 누웠다. 이곳에만 오면 바법을 부린 듯 편안해졌다. 문득 그 남자아이의 이름이 뭐였지, 잘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르며 하슬라는 잠에 빠져들었다.
귓가에 윙윙 울리는 소리에 하슬라는 잠에서 깨어났다. 만족스러운 낮잠에 절로 미소가 떠올라 기지개를 크게 켜보았다. 해가 넘어가면서 층층이 붉은 노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하에라가 저녁을 먹자며 뛰어올 것이다. 그 전에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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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너 뭐야? 귀신이야?"
한 남자아이가 사람의 팔이 벽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소리를 질러댔다. 하슬라는 들켰구나 싶다가 저 아이의 입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문틈에서 나왔다.
"뭐야? 사람이었어? 그런데 벽에서 어떻게 나왔지?"
"맞아. 나 사람이야. 그러니까 조용히 해."
"팔이 벽에서 불쑥 나오는데 사람인지 알게 뭐야.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남자아이는 손을 제 가슴에 대고 고꾸라지는 시늉을 했다. 하슬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아이를 벽으로 밀치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너 내가 여기서 나왔다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어?"
남자아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하슬라는 제 발로 남자아이의 발등을 세게 밟고 나서야 손을 풀었다. 남자아이는 너무 아파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렸다.
"난 네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말하냐?"
입을 삐죽이 내민 남자아이가 하슬라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아, 그렇구나. 내가 누군지 알 필요는 없고. 그런데 넌 누구야?"
"내가 누군지 너도 알 필요는 없잖아."
하슬라와 남자 아이는 서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남자아이가 뒤로 돌아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하자 하슬라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밥 먹으러 가자."
하슬라의 방 앞을 지날 때 하에라가 멀리서 뛰어오기 시작했다. 공부가 끝난 것이 좋은 건지 하슬라를 만나는 게 즐거운 건지 표정이 밝았다.
"어? 아란? 네가 웬일이야?"
"안녕, 하에라. 아버지를 따라 왔다가 성안에서 길을 잃었지 뭐야."
아란이 머리를 긁적이며 뒤따라오던 하슬라를 힐끗 쳐다봤다. 하슬라는 아란의 시선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하에라의 옆으로 갔다.
"아, 그렇구나. 이 길로 쭉 가면 기병대가 모여 있을 거야. 그곳에 가면 근위대장님을 만날 수 있어."
"고마워."
하에라에게 손을 흔들며 뒤돌아 뛰어가던 아란이 한 번 더 하슬라를 쳐다봤지만, 하슬라는 하에라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슬라는 걱정이 되어 하에라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곳에 드나들며 쉬고 싶었던 하슬라는 혹여 아란이라는 아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어쩌지하는 생각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자신의 수다에 맞장구쳐주지 않는다며 토라진 하에라가 먼저 방으로 돌아가 버리자, 하슬라도 방으로 돌아왔다.
'근위대장의 아들이라고? 그럼, 성안에도 자주 올,텐데.'
한 번 더 마주친다면 이번에는 단단히 약속을 받아내리라 다짐하며 하슬라는 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