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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10화

by 백서향

"자 오늘은 기하학에 대해 배워보겠습니다."

하슬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기하학이라는 말에 침만 꼴깍 삼키고 있었다. 책을 내려다 보았지만, 도무지 뭐라고 쓰여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이런 수업을 계속 받아야 한다니. 뾰족한 턱을 약간 치켜들며 하슬라를 내려다보는 가정교사의 말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 건지……."


계속 앉아 있다가는 잠들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하슬라는 그만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아차 싶었던 그녀가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하에라는 바라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하에라 실시간으로 일그러지고 있는 가정교사의 얼굴과 하얗게 질려가고 있는 하슬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풉.


결국 하에라의 입에서 침방울과 함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하에라도 가정교사도 하슬라가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아니, 아무도 하슬라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왕의 딸이니 이곳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하슬라는 떨리는 손을 맞잡고 그대로 서재에서 뛰쳐나갔다. 2층에서는 절대 뛰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지만, 한시라도 2층을 벗어나고 싶었다. 무조건 3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복도 끝으로 내달려 벽돌문을 힘껏 밀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어지럽게 날려 하슬라의 얼굴을 뒤덮었다. 입술 사이에 끼어있는 머리카락을 빼내며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계단까지 내려온 하슬라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그리고 그냥 그곳에 주저앉아버렸다.


하슬라는 수업 시간에 느꼈던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단지 그곳을 벗어나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인 것 같았다. 차라리 배운 적이 없다, 할 수가 없으니 가르쳐달라 말해볼걸 그랬나.


하지만 극도의 긴장 상태였던 하슬라는 그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땀이 식어가자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하슬라는 두 팔로 몸을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나 두리번거렸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슬라는 그 소리를 쫓아 자작나무가 어지러이 자라있는 숲 앞까지 왔다. 과실수가 자라있는 너른 들판과는 반대 방향이었기에 잠시 망설이던 하슬라는 물소리를 찾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다.


자작나무의 수피와 나뭇잎이 은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바닥에는 마른 나뭇잎들이 채 썩지 못한 채 땅을 덮고 있었다. 어둡던 주위가 갑자기 환해졌다. 자작나무 숲 끝에 이르자 작은 시내가 보였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돌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하슬라는 신발을 한 쪽에 벗어놓고 치마를 들고는 시냇물을 건넜다. 비가 많이 오지 않은 탓인지 물은 하슬라의 발목도 오지 않았다.


쓰러진 의자들 뒤로, 담쟁이 잎으로 덮혀 있는 돌담이 늘어져 있었고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들이 규칙적으로 심겨 있었다. 녹슨 랜턴과 담요로 보이는 천 조각도 널브러져 있었다. 비록 잡초가 이곳을 잠식하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정원이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나하나 짚어가던 하슬라는 이곳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좀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하슬라는 테이블과 의자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르고 작은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신 담장에 기대어 앉았다.


어느새 바람이 불고 있었다.



"너 어디 갔었어?"


하슬라의 방에 앉아 있던 하에라가 문여는 소리에 대뜸 큰소리로 물었다.


"주방에 갔었어."


하슬라는 하에라를 외면한 채로 대답하고는 침대로 올라가 이불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너 정말 제대로 된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는 거야? 선생님이 그럴 것 같다고 하시던데. 맞아?"


하에라에게 배려라는 걸 받고 싶어 하면 안되는 거겠지.


"응."


하에라는 그저 하슬라가 아무것도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럼 내가 선생님께 잘 말해볼게. 아버지나 어머니께는 비밀로 해줄 테니까."


큰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이 말하던 하에라는 하슬라가 아무 반응이 없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3층이 다 울리도록 문을 크게 닫고는.


하에라가 나간 후에도 하슬라는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차라리 나를 쫓아내 주었으면 좋겠어.'


간절한 마음이었다.



더이상 하에라와 하슬라는 같은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에라가 아쉬워한 것과 달리 하슬라는 안심했다. 아예 수업을 받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적어도 하에라의 놀림거리는 되지 않을 것이었다.


아침 식사 후 각자의 수업시간을 보내고 나면 둘은 다시 친구가 되었다. 여전히 같이 놀이를 하고 식사를 했지만 둘은 나아갈 길이 전혀 달랐다. 하에라는 왕위를 이어야 할 후계자로서의 교육을 받아야 했고 그건 하슬라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을 일이었다.


하에라와 하슬라가 함께하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하에라는 어려운 학문을 익혀야 했고 하슬라는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며 자수와 악기들을 배워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성안에서의 생활들은 날이 갈수록 긴장의 연속이었다.



"여기 보세요, 아가씨. '도'가 어디라고 했었죠?"


피아노라는 것을 처음 만져본 날 음악을 가르치던 가정교사는 하슬라의 손등을 지휘봉으로 찰싹 내리쳤다.


"기!억! 하시라고요!"


손이 저절로 떨려왔다. 눈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눈물이 떨어져 더 혼날 것만 같았다. 자수를 놓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늘은 땀으로 범벅이 된 손가락에서 자꾸 미끌어져 내려갔고 그나마 제대로 쥐었을 때는 손을 찌르기 일쑤였다.


하슬라의 몸은 갈수록 예민하게 반응했다. 긴장감이 느껴질 때마다 식은땀이 나며 눈앞이 흐려졌다. 사람들 앞에서 가까스로 버틴 하슬라는 주방으로 뛰어가거나 정원으로 내려가 쉬어야만 진정되었다.


가슴을 쓸어내릴 때마다 차라리 그 자리에 쓰러져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살려는 의지는 본능이었다. 하슬라는 숨을 쉬려 노력했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저절로 나오던 눈물도 참으려 애썼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간은 흘러갔고, 하슬라는 버티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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