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조는 시녀장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성안에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제나는 예외였다. 힐조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줄의 제일 끝에 서 있었다.
"하슬라는 바론과 나의 두 번째 아이이자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가게 될 하에라의 동생이니 허투루 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작은 소문이라도 내 귀에 들어오게 된다면 여기 있는 전부가 책임을 지게 할 테니 알아서들 입단속해야 한다. 그 아이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말고 입에 올리지도 말거라."
힐조는 절대 시녀들에게 길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성 밖으로 내쫓거나 벌을 내리면 그만이었다. 아랫것들과 실랑이해 봤자 얻는 게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론의 권위에 흠집이 생겼다. 그리고 소문은 부풀려지고 빠르게 퍼져나갈 것이다. 하지만 힐조는 잘 알고 있었다. 바론과 자신이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시간이 지나면 소문과 흠집은 사라지게 마련이었다. 이제 그 시간을 견디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에라, 또 하슬라 방에 가는 거니?"
복도를 뛰어가던 하에라의 목덜미를 힐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잡아끌었다. 하지만 하에라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 점심식사 시간에는 늦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에라는 그대로 계단을 뛰어 올라가 하슬라의 방으로 달려갔다.
가끔 제 또래의 아이들이 성에 놀러 오곤 했지만 하에라의 성에 차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놀 수 있는 대상이 생긴 것이다. 제 엄마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그저 지금 즐거울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노크도 없이 하슬라 방문을 열어 젖힌 하에라는 그대로 침대 위로 돌진해서 누웠다. 하슬라는 이제 적응이 되었는지 놀라지도 않았다.
"우리 술래잡기 하자! 네가 술래야. 어서!"
하에라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놀이를 질릴 때까지 하는 것. 하에라가 하고 싶은대로 맞춰주기만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하슬라는 그게 좋았다.
"빨리 잡으라니까."
성안에서 잘 먹고 잘 자란 하에라와는 달리 하슬라는 발육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하에서 움직임이 거의 없이 살았으니 가느다란 팔과 다리로는 하에라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하에라는 계속 재촉했다. 마지막 힘까지 쥐어 짜내 한발을 내딛었던 하슬라는 그만 구겨진 카펫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곳에 힐조가 있었다.
"하, 눈에 띄지 말고 살라 했더니 맹랑한 구석이 있었구나."
바닥에 네 발로 엎드린 채 힐조를 올려다보던 하슬라가 고개를 떨구었다. 하필 여기에서 이렇게 마주치다니. 그동안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마주할 일이 없었던 두 사람이었다.
힐조는 하슬라를 슬며시 밀면서 지나가려고 발을 뗐다.
"어머니!"
하에라가 하슬라가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 뛰어오다 제 어머니를 발견했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힐조에게 안겼다. 순간 하슬라가 급하게 일어나 비켜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힐조는 곁눈질로 하슬라를 째려보면서도 자신에게 안긴 하에라를 안아주었다.
"어머니, 아름답게 치장하고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볕이 좋아 정원에 차와 디저트를 준비해 놓으라고 했어. 성안에서 제발 뛰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하에라는 쉬지 않고 힐조에게 말을 시키면서 하슬라를 보고는 눈을 찡끗했다. 고개를 숙인 채 하에라와 눈이 마주친 하슬라도 웃어 보였다. 하에라가 제 멋대로기는 해도 자신을 아주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에라와 힐조가 시야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하슬라는 힘이 풀린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아무래도 하에라와의 놀이는 여기서 끝이 난 듯했다. 대신 하슬라는 부엌으로 가보기로 했다.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제나가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부엌은 1층 성문 가까이에 있었다. 식재료들이 드나들기 편하기도 했고, 바론의 과수원과 가깝기도 했다. 부엌을 지나 뒷문으로 나가면 텃밭과 제나가 쓰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그곳이 하슬라가 이곳에 처음 온 날 잠을 잤던 제나의 방이었다.
윗분들이 드나들 리 없는 곳이기에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은 축제가 벌어지는 곳 같았다.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화덕의 불은 모닥불 놀이를 연상시킬 만큼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이 성을 지은 이후로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진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화구가 놓여있는 곳에서는 맛있게 보이는 수프가 끓고 있었다.
뜨거운 불들을 지나자 차가운 물이 가득 든 대야 안에는 갖은 채소가 가득 담겨있었다. 언제 보아도 커다랗고 싱싱해 보이는 채소들은 먹음직스럽게 보였지만 막상 입에 들어가면 맛이 없었다. 대신 그 옆에 쌓여있는 과일에 손을 가져갔다. 포도를 티가 나지 않게 따서 입어 넣었다. 톡 터지는 껍질 사이로 쫀득한 과육이 씹혔다. 하슬라는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아가씨! 언제 왔어요?"
제나가 웃음을 한가득 물고는 하슬라에게 뛰어왔다. 하슬라도 하에라처럼 뛰어가 안기고 싶었지만, 웃을 뿐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하슬라가 안쓰러워 제나는 먼저 안아주었다. 흙냄새가 확 풍겨왔다. 평생 잊지 못할 냄새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나랑 당근 좀 다듬어요."
제나는 바구니에 가득 담길 당근을 하슬라 앞에 쏟아내었다. 꼭 파슬리를 닮은 여린 잎들이 당근과는 안 어울려 보였다. 제나는 그 잎들을 따서 한 구석에 모았다. 하슬라도 곧 따라 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가 얼마나 할까 싶었지만, 손이 생각보다 야무졌다.
"잘하시네요. 다음에는 감자를 같이 캐 와서 빵을 만들어 봐요."
하슬라는 대답 대신 환하게 웃어보였다. 좀 전에 힐조를 마주친 일이 나쁜 일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