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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8화

by 백서향

성에서 보내는 첫날 밤 하슬라는 밤새 뒤척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이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왕이 사는 궁전 지하에서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이었으니. 아버지라는 바론이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하에라가 반겨주었지만, 하슬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여기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 때문에 왕도 바론도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결국 잠을 잘 수 없었던 하슬라는 겉옷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바론의 집무실과 응접실, 침실이 2층 왼편에 있는 것과 달리 하슬라의 방은 3층 오른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모두 잠든 시각, 이곳까지 올 사람이 없건만 하슬라는 조심조심 복도를 걸어 나갔다.


중앙 계단까지 걸어 나갔던 하슬라는 내려가는 대신 다시 자신의 방 쪽으로 되돌아갔다. 걷고 또 걸었지만 여간해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하슬라는 자신의 방을 지나쳐 복도 끝까지 걸어가보았다. 곧은 길이라 생각했는데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방이 보이지 않았다. 성은 곡선을 이루도 있었다. 하슬라는 그대로 벽에 기대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얼마나 있었을까. 하슬라는 잠옷이 살랑살랑 다리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바깥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거다.'


벽을 더듬던 하슬라는 문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왕궁의 지하에 갇혀 있을 때도 자신의 방에 이것과 비슷한 문이 있었다. 벽과 똑같이 생겼지만, 손잡이가 없는 문. 하슬라는 힘을 주어 문을 밀어보았다.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벽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가루가 하슬라의 발등 위에 떨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보았다.


칠흙 같은 어둠 때문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발을 내디디면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난 하슬라는 손안에서 불빛을 만들어 밖으로 내보냈다.


'계단이잖아.'


하슬라는 맨발로 한 걸음씩 계단을 내딛기 시작했다. 불빛들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하슬라가 그 뒤를 천천히 밟았다. 하슬라의 발바닥에 푹신한 풀잎이 느껴졌다. 불빛을 좀 더 크고 멀리 내보낸 하슬라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너른 들판에 각종 과실수 늘어져 있었다. 불빛을 받은 과일들이 조명을 달아놓은 것처럼 빛났다. 하슬라는 사과를 하나 따서 바닥에 앉았다. 사과를 깨무는 소리에 잠시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하슬라는 밤하늘의 별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감옥과도 같은 좁은 방안에서 보던 그 별과 같은 것이었다. 새카만 하늘에 빼곡히 박혀있는 그것들이 오늘따라 빛나 보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한 밤이었다.



하슬라는 벌컥 문 여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슬라! 지금 일어난 거야? 아침 먹으러 갈 시간인데."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서야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하슬라는 아침 식사에는 꼭 참석하라는 제나의 말이 떠올랐다.


"아, 미안. 빨리 준비할게."


하에라는 허둥지둥 움직이는 하슬라를 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우리 아침 먹고 내 방에서 놀자. 재미있을 거야."


세수를 하고 옷을 겨우 입은 하슬라의 귀에 하에라의 말이 들어올리가 없었다.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의 첫 식사였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가자."


하에라가 하슬라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성안에서는 뛰지 말라는 주위를 수없이 받았지만 하에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성의 다음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버지인 바론 앞에서만은 누구보다 얌전히 행동했다. 제멋대로인 하에라에게도 바론은 무서운 존재였다.


가족 전용으로 마련된 식탁에는 알록달록 잘 익은 과일과 한 눈에도 신선해 보이는 채소로 만든 샐러드가 놓여 있었다. 따끈한 빵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바론과 힐조가 식탁 앞에서 앉자, 하슬라와 하에라도 맞은편에 앉았다. 숟가락과 포크가 놓여 있던 자리가 따끈한 수프로 채워졌다. 바론이 숟가락을 들고 곧이어 힐조와 하에라도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떠먹었다.


"식사 예절을 배워야겠구나."


힐조는 샐러드를 제 접시에 덜지 않고 바로 입으로 가져가는 하슬라를 힐긋 보았다. 하에라가 하슬라의 손에 집게를 쥐여 주고는 샐러드를 덜라는 손짓을 했다. 하슬라는 고맙다는 눈짓을 한 후 떨리는 손으로 샐러드를 접시에 덜었다.


샐러드가 식탁 위에 떨어질 때마다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닿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날때마다 힐조의 한숨이 날아들었다. 하슬라는 어떻게 식사를 끝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가 빨리 끝나 방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어디가? 우리 놀기로 했잖아?"


"응? 내가?"


"응. 아까 방에서 얘기한 거 못 들었어?"


하에라의 손이 이미 하슬라의 손을 잡고 뛰고 있었다. 하슬라의 눈은 계단을 향했지만 몸은 반대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하얗게 칠한 문에는 화려한 꽃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문을 열자, 햇살이 한가득 들어와 순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바로 보이는 테라스에는 티테이블과 푹신한 의자가 놓여 있었고 오른쪽에는 금박 무늬로 수놓아진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침대가 있었다. 왼쪽에 있던 접이식 문을 밀자 수많은 악기가 놓여 있었고 그 옆쪽에는 수많은 책이 꽂혀 있는 책장이 천장 끝에 닿아 있었다.


하슬라는 '와'하는 입 모양을 만들며 차마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물건들에 넋이 나갈 것 같았다. 그런 하슬라를 보는 하에라의 어깨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아버지가 앞으로는 너와 같이 공부하게 될 거라고 했어."


"공부?"


하슬라는 순간 놀라 뒤를 돌아봤다. 도대체 바론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슬라는 정확히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인간들은 원하는게 있을 때만 자신에게 잘해주었다. 때문에 바론과 하에라도 분명 자기에게 원하는 게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왜 너랑 공부하는 건데?"


하슬라의 날 선 목소리게 하에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우리는 자매니까. 물론 너랑 나는 조금 다르다고 어머니께서 알려주시긴 했어. 그래도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지금 폐하는 어디에 계셔?"


"아침 식사 후에는 정원에서 산책하셔."



하슬라는 하에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하에라가 알려준 덕분에 정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형형색색의 꽃들이 빼곡히 피어 있었다. 그런 꽃들 사이로 벌과 나비가 부지런히 움직였고, 바론은 손가락 사이로 꽃잎을 훑고 있었다.


바론이 보이자, 하슬라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다행히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심히, 하지만 바론이 발소리를 듣기를 바라며 다가갔다.


"어? 하슬라 아니니?"


하슬라는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바론은 하슬라의 손을 살며시 잡고 자세를 낮추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니?"


하슬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여기까지 달려오긴 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다. 말해보거라. 불편한 게 있는 거니? 아니면 괴롭히는 사람이라도 있어?"


"저……. 왜 저에게 잘해주시는거예요?"


"뭐?"


바론은 웃긴 얘기를 들었다는 듯 큰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슬라는 바론이 왜 웃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에게 원하는 게 있으실 것 같아서요."


"인간들이 너에게 그런 식이었나 보구나."


바론은 일어서면서 주먹이 빨개지도록 힘을 주었다. 입 밖으로 심한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아이 앞이라 참는 게 느껴졌다.


"아가야, 여기서는 너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 거란다. 너를 온전히 받아주고 환영해 줄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낄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약속하마. 인간들의 방식으로는 너를 대하지 않겠다고."


바론이 빨개진 하슬라의 뺨을 어루만졌다. 바론의 손끝에 하슬라의 한숨이 느껴졌다.


인간들이 저 아이를 포기하고 지금이라도 자신에게 보낸 게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었다. 비록 아버지인 자신조차 지금은 하슬라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어도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하슬라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기억이 존재하는 한 그녀는 한 번도 마음 편히 지내본 적이 없었다. 밤이고 낮이고 들이닥쳐 닦달하던 인간들 때문에 나중에는 발소리만 나도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제 겨우 10살. 한창 부모에게 사랑받고 자라야 하는 아이는 모든 것이 걱정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바론이 확신을 주는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조차도 하슬라는 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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