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하슬라는 장식 없는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지난밤 얼어붙어 있던 표정이 훨씬 풀어져 있었다.
"이제 폐하를 뵈러 갈 거에요. 너무 긴장하실 거 없어요. '네'라는 대답만 잘하시면 문제 될 게 없을테니까요."
제나는 계단을 뒤뚱이며 올라가는 하슬라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가느다랗고 하얀 손이 차가웠다. 제나는 하슬라의 반대편 팔을 감싸주며 같이 계단을 올랐다.
똑똑.
미리 약속이라도 되어 있었는지 문지기들이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집무실이 아닌 응접실에는 어제 만났었던 바론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또래의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폐하께 먼저 인사드리세요."
하슬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만 숙였다. 화려한 무늬의 카펫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왕후께도."
제나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있는 하슬라의 몸을 힐조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돌려주었다. 순간 곁눈질하는 힐조의 눈에 못마땅함이 스쳐 갔다.
"여기는 하에라 아가씨에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슬라를 쳐다보던 하에라가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려고 하자 힐조가 조용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힘을 주었다. 하에라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성에서 살면서 알아둬야 할 일은 여기 제나가 모두 알아서 해줄 테니 이제 방을 보여줘야겠지. 앞으로 네가 지내게 될 방 말이다. 제나?"
제나가 의자로 하슬라를 안내하려 하자 힐조가 선수를 쳤다. 다시 한번 크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하슬라는 제나를 따라 살금살금 걸어 나갔다.
그때까지도 바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힐조는 언성을 높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지만, 아니 그보다 더 차분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이 방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하녀를 부르시거나 저를 불러주시면 되고요."
제나는 하슬라를 3층의 구석진 방으로 데려갔다. 힐조는 하슬라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길 바랐다. 힐조에게 하슬라는 왕의 사생아일 뿐이라는 것을 제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 아침 식사는 꼭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으니 매일 아침 7시에 2층에 있는 응접실로 오시면 됩니다."
제나는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고는 하슬라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저, 전 앞으로 여기서 무엇을 하면 되나요?"
하슬라는 방 안을 크게 둘러보고는 제나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물었다. 이 성에 들어온 후로 친절하게 자신을 대해주던 제나와 떨어지는 것이 무서워지던 참이었다.
제나는 그런 하슬라가 걱정된다는 듯이 한번 꼬옥 안아주었다.
"무얼 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저 왕비님의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되도록 그분의 눈에 띄지 마세요. 대신 이 방에서는 하고 싶으신 대로 하세요. 성안에서 무엇을 하게 될지는 차차 알게 되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제나는 풀이 죽어있는 하슬라를 보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너무 심심하시면 부엌으로 놀러 오세요. 왕후께서는 절대 그곳에는 들어오지 않으시니까요."
그제야 얼굴이 풀어진 하슬라를 보고는 안심한 제나가 방을 나섰다.
하슬라는 자신이 지내던 지하의 방과는 너무도 다른 이곳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밖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창문이 있던 그곳은 1년 내내 추웠다. 하지만 여기는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큰 창문도 있었고 옷이 가득한 옷장과 푹신한 침대도 있었다. 더군다나 부드러운 털을 가진 인형들이 많이 있었다. 하슬라는 침대 위로 올라가 그중에서 강아지 인형을 꼭 안고는 그대로 누웠다.
"야!"
하슬라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대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뭘 그렇게 놀래? 아까 우리 만났잖아. 하슬라 맞지?"
그대로 얼어붙은 그녀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난 하에라야. 우리가 자매라던데. 너랑 나랑 나이도 같고 얼굴도 비슷하고. 히히."
하에라는 어른들의 복잡한 심경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같이 놀 사람이 생겼다는 것에 들떠 있었다.
짙은 파란색 머리에 동그랗게 큰 눈이 바론과 똑 닮아 있었다. 하슬라는 자신의 보라색 머리를 한번 만져보고는 하에라의 파란색 머리를 다시 쳐다보았다.
"나가자. 내가 성안을 구경시켜줄께,"
하슬라가 안돼라는 말을 할 새도 없이 어느새 하에라의 손에 끌려 나가고 있었다.
"여긴 어머니와 아버지의 침실이야. 여기는 웬만하면 들어가지 마. 어머니의 잔소리를 어마어마하게 들어야 하거든."
하에라는 하슬라의 손을 잡고 3층에서 중앙 계단을 내려가서 2층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문이 보일 때마다 차례로 설명을 이어가던 하에라가 갑자기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여긴 아버지의 집무실이고 그 옆이 손님 접대를 하는 응접실이야. 여기를 지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해. 어머니 말에 따르면 체통을 지켜야 한다나. 크크. 그리고 여긴 도서관이고 그 옆은 서재야. 우리 1층에 내려가 보자."
하슬라는 그저 하에라가 신기하기만 했다. 또래를 처음 보는 것도 있었지만 저렇게 쉴 새 없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1층 문을 나가면 정원으로 나갈 수 있어. 저기 보이지? 아버지가 시간만 있으시면 나가서 계시는 곳이야.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꽃과 나무가 있다고 해. 나비와 벌도 많고 새들도 많이 살고 있어. 그리고 이 길로 죽 걸어 나가면 성 밖으로 나갈 수 있고."
하에라가 손가락은 도열해 있는 석상들을 죽 지나 병사들 앞에서 멈추었다. 마차가 세 대 정도 지날 수 있는 큰 길이었다.
저 길을 걸어서 성안으로 들어왔었나. 하슬라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옆, 하슬라가 놓여있던 제단만큼은 선명하게 기억났다.
자신을 말 위로 집어 올리던 거친 손길은 제단에 내려놓을 때도 무척이나 거칠었다. 하슬라는 그때 팔에 난 상처를 무심결로 만져보았다. 거친 딱지가 만져지자, 그것을 조금 떼어냈다. 하에라가 하슬라를 잡아끌지 않았다면 피를 보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밖으로 나가 려면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해. 이건 어머니한테 졸라도 안 되는 일이야. 도대체 왜 그러시는건지."
하에라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걸 억지도 참고 있다는 듯이.
"밖이 위험해?"
"아니, 위험하기는. 그냥 아버지는……. 잠깐 너 말했네."
하에라는 신기하다는 듯이 하슬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응접실에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제서야 생각났다. 하슬라는 겸연쩍게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