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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5화

by 백서향

인간들이 부르는 금기의 땅은 원래 강이 보이는 얕은 산이었다.


아주 오래전 인간 세상에 심한 가뭄이 든 적이 있었다고 했다. 드넓은 평야가 펼쳐지고 강물이 쉴 새 없이 흐르던 그곳이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졌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다른 곳으로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지만, 그곳을 통치하던 왕은 계속해서 하늘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왕은 그 산에서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밤낮을 빌고 또 빌었다. 남은 사람들도 그런 왕을 보며 하나둘 모여들어 같이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결국 하늘까지 닿았다. 평소 인간을 흠모하고 있던 신은 비를 내려주었다. 인간 세상은 푸른빛을 되찾았고 떠났던 사람들은 하나둘 돌아왔다.


비의 신은 인간들과 같이 살아가길 원했다. 왕도 기뻐하며 자신이 기도했던 산에 성을 지어주고 극진히 대접했다. 신은 자신이 통치하던 세상을 그대로 인간 세계로 내려오게 했다. 인간 세상은 사시사철 먹을 것이 풍부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넘쳐흘렀다. 사람들은 비의 신을 생명의 신이라 부르며 칭송하고 경배했다.


성 앞에는 신을 기리는 꽃들과 과일들로 넘쳐났으며 왕은 생명의 신과 그 가족을 초대해 축제를 열곤 했다. 생명의 신이 제명을 다하고 자신의 아이가 그 자리를 물려받고도, 왕이 죽고 그다음 왕이 그 자리를 물려받아도 그 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인간과 신의 경계가 무너져 어디가 신의 세상이고 어디가 인간의 세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 있으면 모두가 인간 같아 보였다.


하지만 욕심이 과했던 탓이었을까. 풍족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탓이었을까. 극심한 가뭄으로 타죽을 것 같은 아픔을 겪지 못했던 까닭이었을까.


왕위를 물려받은 새로운 왕은 더 이상 생명의 신을 떠받들기 싫어졌다. 거만하고 오만했던 왕은 스스로 생명의 신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의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은 신의 혈통을 지닌 아이가 물려받는다는 걸 알게 된 왕은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생명의 신과 그곳의 사람들을 초대해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유난히 독한 술과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축제가 계속되는 동안 왕은 생명의 신인 바론을 데리고 자신의 성으로 돌아갔다. 이미 많이 취해있던 바론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왕은 인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불러들였다. 바론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지만, 아름다운 여인이 풍기는 향기에 어쩔 줄을 몰랐다.


다음 날 인간 세상도 생명의 땅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물건을 팔고 맛있는 음식으로 행복해했다. 생명의 땅에 사는 신의 사람들도 전날 밤 있었던 축제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으로 돌아온 바론은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평소보다 기분이 좋았던 것도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이상했다. 희미하게나마 여인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항상 자신을 절제하고 조절하며 살았던 바론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0달이 지나고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신비로운 보라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왕은 아이의 머리카락이 생명의 신처럼 짙은 파란색이 아닌 것이 걸렸지만 비를 내려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6살이 되고 7살이 되고 10살이 되어도 아이는 그저 보라색 불꽃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화가 난 왕은 그 아이를 생명의 땅 제단에 버려두었다.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만한 왕은 그 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지도 않았다. 지금처럼 그저 풍요로운 나날이 지속될 줄 알았다.


바론은 자신을 기만한 인간들에게 분노했다. 생명의 땅과 인간 세상에 거친 덩굴로 경계를 만들고 더이상 인간들을 들어올 수 없게 했다. 인간들이 그 덩굴을 건드리면 더욱 크고 굵게 자라나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죽지 않을 만큼만 비를 내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왕이 자신에게 잘못을 빌고 뉘우치기를 기다렸다.


그만큼 왕은 인간들을 사랑했었다.


인간들은 그들의 왕이 아닌 생명의 신을 원망했다. 제단에 꽃과 과일을 바치며 기도하면서도 낫과 쟁기를 들고 몰려오기도 했다. 더 이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바론은 자신의 병사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명의 땅은 어느새 금기의 땅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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