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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6화

by 백서향

제단 앞에 바들바들 떨고 있던 작은 여자아이를 직접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온 건 바론이었다.

경비병들은 순찰하다 제단 앞에서 작고 꿈틀대는 짐승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뭐야? 강아지인가?"


"강아지치고는 큰데. 망아지 아니야?"


칼자루에 손을 댄 채 조심스럽게 다가간 경비병들은 작은 짐승이 고개를 들자 놀라서 엉덩방아를찧었다.


"어린 아이잖아? 아이가 왜 여기에 있지? 혹시 아이를 제물로 바친 건가?"


"예끼!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바쳤을까. 얘야? 누구니? 어디서 왔냐?"


한쪽 손에는 방패를 들고 다른 한손에는 칼을 쥐고 있는 모습을 모자 아이의 몸이 더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눈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이 한가득이었다.


"애 울겠네. 그러지 말고 근위 대장님께 보고드리자고."


경비병들은 아이를 가까스로 달래서 성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집무를 보던 바론이 바람을 쐬러 테라스로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순찰을 하여야 할 경비병들이 제단 앞에 쪼그리고 있자 이상하게 생각한 바론은 직접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무슨 일들이냐?"


바론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경비병들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주저앉은 자세로 취했다.


"그게 제단에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근위대장께 데리고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바론의 시선이 곧 아이에게로 향했다.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는 곱슬머리가 어깨에 닿을 듯 흔들리고 있었고 눈물로 가득 찬 커다란 눈 안에는 같은 색깔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있었다. 순간 바론에게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10년 전 기억 나지 않았던 그 밤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왕이 나를 속였구나. 그날 그놈이 무슨 일을 꾸몄던 것이 틀림없었다.'


주먹을 쥔 두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론은 아이를 먼저 진정시키기로 했다. 그는 무릎을 바닥에 대고 허리를 세워 아이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었다.


"아가야, 이름이 있니?"


두려움에 가득찬 아이는 눈동자를 굴릴 뿐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바론은 경비병에게 자리를 피하라고 명령한 후 다시 아이의 눈을 맞췄다.


"이제 괜찮다. 어디서 온 거니?"


아이는 대답 대신 손으로 인간 세상을 가리켰다. 그 손끝은 왕이 사는 궁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구나. 춥고 배고플 테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바론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감싸 쥐고는 성안으로 한 걸음씩 인도했다. 아이는 여전히 떨고 있으면서도 주위를 계속해서 두리번거렸다. 바론은 곧장 주방 시녀장인 제나를 불러들였다.


"이 아이를 씻기고 배부르게 먹이게."


"그 후에 폐하께 데려갈까요?"


"아니, 내가 부를 때까지는 아이를 방에 있게 하게나."


바론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제나는 작은 아이가 물속에서 넘어지기라도 할지 걱정되어 물을 욕조에 반만 채워 넣었다. 제나가 옷을 벗기려 단추에 손을 대자 아이가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옷을 입은 채로 욕조에 앉혀 놓고는 따뜻한 물이 아이의 긴장을 풀어줄 때까지 기다렸다.


따뜻한 물에 아이를 씻긴 후 하얀 잠옷으로 갈아입히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눈물이 걷힌 눈동자는 희다 못해 창백한 아이의 얼굴에서 더 선명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던 제나가 아이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평소에도 바론의 손발이 되어 주던 그녀는 이번에도 눈치껏 아이를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감춰두었다.



바론은 근위대장인 무들만 동행한 채 왕의 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매제가 될 뻔한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의 고삐를 움켜쥔 손에 피가 맺힐 무렵 도착한 왕궁 앞에는 수많은 경비병이 늘어져 있었다.


무들은 바론을 뒤에 세우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생명의 땅에서 왕이 오셨다고 전해라."


크고 간결한 외침에 성문이 열렸다. 예상된 방문이라는 듯 바론과 무들은 곧 왕의 응접실로 안내가 되었다. 빠르게 다과가 나왔지만, 바론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인간 세상의 왕인 비슬은 바론의 눈치를 살피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비슬, 나에게 할 말이 있지 않은가?"


둘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기운을 느낀 무들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비슬의 성격이 제멋대로이긴 해도 어제까지만 해도 친형제처럼 지냈던 두 사람이었다. 더 이상했던 건 비슬의 태도였다. 바론의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바론은 자세 한번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그런 비슬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점심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비슬은 바론만 남기고 주위를 모두 물렸다. 하지만 무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걸렸는지 옆방으로 들어가 테라스를 뛰어넘어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방에 둘만 남자 비슬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입가에는 비웃음이 묻어 있었고 외로 꼰 다리를 까딱거렸다.


"그 아이 때문에 여기까지 납신건가요? 폐하."


비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론이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죽거리는 비슬의 한마디가 바론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했다. 칼이 있었으면 당장이라고 그의 목을 베었을 것 같았다.


"이거 놓으시고 말씀하시죠?"


비슬은 바론의 두 손을 잡아 힘을 주어 바닥으로 내친 후 자신의 옷깃을 매만졌다. 그는 바론의 눈을 보자 히죽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주 우스운 광경을 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친구라고 생각했고 형제라 여겼었다. 그런데 감히 네가 나를 농락하다니. 너희가 이렇게 풍요롭게 사는 게 다 누구 덕인데!"


"바로 이런 태도가 문제란 말입니다. 친구요? 형제라고 하셨습니까? 한 나라의 왕인 내가 꼬박꼬박 존칭과 존댓말을 써가며 모셔야 했던 분이 당신입니다. 우리는 그런 당신에게 납작 엎드려 비를 구걸해야 했어요."


당신이라는 말을 들은 바론의 몸이 분노로 떨리기 시작했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비슬의 눈이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난 당신을 섬기며 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야만 이 나라와 백성들을 보전할 수 있다고 말이에요. 나뿐만 아니라 이 나라 백성들 모두 그 말을 진리인 양 받아들이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의문이 들기 시작했어요. 친구이자 형제라고 하면서 왜 그들을 떠받들어야 하는지. 왜 비를 내려달라고 빌어야 하는지. 왜! 당신들은 그냥 나눠주지 않는 건지!"


바슬은 급기야 의자에서 일어나서 바론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바론의 두 어깨를 힘주어 누르고는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 힘을 가지면 구걸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생명의 신이 가진 힘은 대대로 그 혈통에게만 내려온다고 전해졌지요. 그럼 그 혈통을 가진 아이를 내가 갖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로 생각했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나."


바론은 아이의 눈물 가득한 눈이 떠올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바슬은 그런 바론을 비웃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실수한 거지요. 부모가 둘 다 생명의 땅의 사람이었어야 했나 봅니다. 뭐, 이제 와서 후회하면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 아이를 제단에 버렸나?"


"꼴 보기도 싫은데 죽이지 않은 게 어딥니까?"


그 소리에 바론의 인내심이 바닥을 쳤다. 바론은 이곳이 어디인지도 잊은 채 비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무들이 한발 빨랐다.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온 무들이 바론을 막아섰다. 제아무리 바론이라도 무사인 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의 날이 두렵지 않은가? 농작물이 타들어 가고 땅이 말라가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괜찮단 말인가? 왕의 의무를 다하지 않겠단 말인가!"


"뭐, 어차피 그들은 저를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 원망의 화살은 생명의 땅을 향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제게는 폐하께서 인간들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거든요. 인간을 누구보다 사랑하지 않습니까?"


바론의 귀에 비슬의 웃음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비슬은 자신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했다.



"오늘 일은 평생 비밀로 해주게."


"이미 머릿속에서 지웠습니다. 폐하."


바론은 무들에게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고 명령했다. 무들이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지 않으리라는 것은 바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 부인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바론은 무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불안했다. 그렇지는 않을 테지만 무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날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성으로 돌아온 바론은 아이를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오게 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을 아이였지만 제 핏줄이었고 자신이 책임져야만 할 아이였다.


아이는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제나가 살며시 두 어깨를 감싸 한 걸음씩 앞으로 걷게 했다.


그 모습을 본 바론은 서둘러 걸어와 아이 앞에 몸을 낮추었다.


"내가 네 아버지란다. 하슬라. 그게 네 이름이야. 지금까지 네가 살았던 세상은 잊고 이곳에서 웃으며 살았으면 좋겠구나."


바론은 하슬라를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슬라도 그런 바론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그날 밤 바론은 그의 부인 힐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는 용서를 구했다. 하슬라의 거취를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힐조는 처음에 바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생아가 태어나자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슬의 평소 성품으로 보아 충분히 일어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를 기회로 만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화를 내보았자 이미 일어난 일은 없어지지 않는다.


힐조는 한참 동안 바론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자세는 손가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바론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폐하, 그 아이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제 비호 아래 두겠습니다. 다만, 문서로서 약속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바론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후 힐조와 집무실로 향했다.


"만약 다른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도 하에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는 문서를 작성하고 날이 밝는 대로 공표해 주십시오."


왕위는 무조건 첫째가 이어야 한다는 게 힐조의 생각이었다. 다른 아이가 태어난다 해도 그렇게 해야만 잡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하에라는 힐조를 많이 닮은 아이였다.


"그것뿐입니까?"


"그리고 그 아이를 신의 영역 안에 들이지 않겠습니다. 성안에서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성인이 되어 결혼하게 되면 성 밖으로 내보내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리다."


바론은 힐조가 조용히 넘어가 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 아이를 절대 거둬줄 수 없다고 하면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었다. 결국엔 아이를 밖으로 내쫓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예상하고 털어 놓았던 것이다.


힐조는 아이를 바론의 핏줄로는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하에라와 동등하게 대해 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바론은 아이를 직접 살필 여유가 없을 테니. 성안에 대충 살게 하다 내쫓으면 그만이었다.


바론은 사랑하는 부인이자 성을 이끌어가는 동반자인 힐조를 위해 작성한 문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흠이 될 수도 있는 하슬라의 출생을 끝까지 묻어두기로 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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