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라온은 누군가가 자신을 건드리는 느낌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또 왔네?"
잔뜩 긴장했던 라온은 하슬라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들어와."
하슬라는 이번에는 라온을 복숭아나무 아래로 데려갔다. 라온은 기운이 없어 떨리는 손으로 복숭아를 따서 허겁지겁 입에 욱여넣었다. 하슬라는 무릎을 세워 그사이에 얼굴을 얹어놓고는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라온은 하슬라의 시선이 느껴지자 멋쩍어 하며 복숭아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복숭아가 그렇게 맛있어? 왜 그렇게 빨리 먹어?"
"배가 고파서.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든."
"왜?"
정말 궁금한 얼굴로 물어오는 하슬라를 보며 라온은 잠시 망설였다. 모든 것이 풍족한 이곳에 사는 하슬라가 구걸하지 않으면 한 끼조차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슬라, 너 혹시 생명의 신이 누군지 알아? 여기 사니까 본 적도 있겠지?"
라온은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두 손을 모아 꼭 쥐며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아버지를?'
하슬라는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비 좀 내려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석 달째 비가 내리지 않아서 먹을 게 없어."
라온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모았던 두 손이 저절로 풀리며 바닥으로 떨궈졌다.
하슬라는 한걸음 물러서며 라온의 눈을 피했다. 인간 세상에 비가 내리지 않는 게 자신의 탓이라 여겼다. 자신이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가 화가 나 인간에게 비를 내리지 않게 된 거라고.
"이제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마."
하슬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당황한 라온이 달래보려 했지만, 하슬라는 이미 성 쪽으로 뛰어간 뒤였다.
라온은 차마 따라가 보지 못하고 하슬라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보고만 있었다. 비를 내려달라 부탁하고 싶다는 말이 실수였을까? 하슬라가 그 말을 듣고 나를 싫어하게 된 걸까? 조금 전까지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이젠 폭풍우가 치는 들판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었다.
과일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하슬라를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라온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라온은 계속 뒤를 돌아보며 덩굴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혹시나 하슬라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하지만 라온이 덩굴을 나와 입구를 다시 가려 놓을 때까지도 하슬라는 나오지 않았다. 라온은 표시해 놓은 입구를 없앨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낭 놔두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을 테니까.
성 안으로 들어간 하슬라는 자기 방 대신 2층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버지이자 생명의 신이라 불리는 바론은 늦은 시각까지 그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슬라는 거대한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아버지는 만날 때면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정작 바론은 언제나 따뜻한 얼굴로 하슬라를 맞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똑똑.
하슬라는 조심히 노크를 하고 문을 힘껏 밀었다. 예상대로 바론은 커다란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하슬라, 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니? 잠이 오지 않니?"
짙은 파란색 머리카락에 커다란 눈동자, 미소 짓고 있는 검붉은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슬라는 차마 아버지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도 자신에게 화를 낸 적이 없는 아버지였지만 하슬라는 그럼에도 바론이 무서웠다.
"폐하……."
"하슬라 둘이 있을 때는 아버지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잖니. 괜찮아."
"아…… 버지."
"그래, 말해보거라."
"아직도 인간들이 미우세요?"
하슬라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빠르게 내뱉었다. 바론은 당황했지만, 천천히 일어나 하슬라 앞으로 다가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바론이 하슬라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손을 잡았다.
"비가 내리지 않잖아요. 제가 이곳에 온 이후로 인간 세상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바론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 아이는 모든 것이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라고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올 거로 생각했다.
"그래, 인간 세계에 비가 내리지 않은 지 오래되긴 했구나. 하지만 하슬라. 나에겐 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단다."
그제야 하슬라는 눈을 뜨고 바론을 바라보았다. 바론은 하슬라의 두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중에 네가 크면 다 말해주마. 지금은 그저 걱정 없이 여기서 잘 지냈으면 좋겠구나."
"네. 폐하. 아니, 아버지."
"자 이제 자러 가야지. 너무 늦었어."
바론은 하슬라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하슬라는 그제야 웃으며 바론에게 인사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