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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2화

by 백서향

"얘! 얘야. 여기서 이러고 자고 있으면 어떡하니. 일어나 보라니까."

라온은 한쪽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렸다. 웬만한 남자보다 덩치가 좋은 아주머니가 라온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어젯밤 그대로 뛰어서 마을로 돌아온 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제풀에 지쳐 아무 곳에서나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라온은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말라 버린 강 옆으로 역시 메말라 버린 밭이 있었다. 라온의 몸은 그 근처에 있던 집 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다.


"너 집이 어딘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 에고, 몰골이 그게 뭐냐? 집이 없어? 부모님은?"


라온은 계속되는 아주머니의 추궁에 고개를 저었다. 가뭄에 계속되면서 자신 같은 고아는 점점 살기가 힘들어졌다. 심부름을 해주고 밥을 동냥하며 살아왔지만 이젠 그마저도 해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라온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마을에서 이런 아이를 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불쌍했지만 하나를 거두면 다른 아이들도 거둬달라 떼를 쓰며 몰려들 것이 뻔해 매몰차게 내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지꼴을 하고 서 있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얘야. 저기 더 아래로 내려가면 강물이 조금은 남아 있는 곳이 보일 거야. 일단 얼굴이랑 몸을 좀 씻어. 입을만한 옷가지들을 주마. 그 꼴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 같구나."


라온은 일단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강으로 내려가 몸을 최대한 깨끗이 씻었다. 상처가 난 곳에 물이 닿자 따가웠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젯밤에 먹은 사과 덕분에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라온은 오두막의 문을 빼꼼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집인 줄만 알았던 오두막은 음식을 팔고 있는 식당이었다. 라온은 한발 한발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부엌 쪽에서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왔니? 씻고 나니 한결 낫구나. 여기 이 옷으로 갈아입으렴. 이 마을에 사니?"


"아니요. 이곳저곳 떠돌다 요즘에는 이 마을에서 지내고 있어요."


라온을 옷을 받아 들고 구석으로 가서 갈아입었다. 옷이 좀 크긴 했지만 접으니 그런대로 입을만했다.


"저……. 아주머니."


"응?"


"부탁이 있는데요."


"여기서 살게 해달라는 건 안돼!"


지금껏 온화한 얼굴로 라온을 대하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순간 무섭게 변했다. 라온은 저런 표정의 어른들을 숱하게 봐왔다. 불쌍하게 쳐다보다 한순간에 돌변하는 얼굴을.


"아니에요. 여기서 심부름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돈은 안주셔도 되요. 가끔 남는 음식 있으면 좀……."


"안돼! 너 같은 아이가 한두 명인 줄 아니? 너를 거두면 소문을 듣고 아이들이 이곳으로 몰릴 거야. 사정은 딱하지만 지금 내 코가 석 자야. 너도 봤다시피 강물은 말라가고 밭에는 이제 남은 농작물도 없어. 나도 장사를 접어야 할 판이야. 인제 그만 나가봐!"


"네……."


라온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게 있다면 여기서 더 부탁해 봤자 돌아오는 건 매질 뿐이라는 것이었다. 빨리 체념하고 다른 집으로 가서 사정을 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었다.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계속해서 졸라댈 줄 알았던 아이가 순순히 물러나자, 아주머니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너무했나? 아니야. 잘한 거야. 그럼.'


그녀는 치마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아이가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당을 나온 라온은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하슬라를 다시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 마을에서 버텨야 했다. 큰 분수대가 있는 광장에 도착했지만,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시장이 있을 만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몇몇 상인이 말라비틀어진 채소와 과일을 팔고 있을 뿐이었다. 라온은 오늘도 밥을 얻어먹기는 글렀구나 싶어 다시 금기의 땅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굶는 것도 걷는 것도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손발이 떨리고 자꾸 눈이 감겼다. 걸을 때마다 흙먼지가 날려 눈이 따가웠다. 처음에는 하슬라를 보고 싶어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어제 먹었던 사과가 간절해졌다.


해가 지고 별이 희미하게 보일 때가 되어서야 덩굴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자신이 표시해 놓았던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구멍도 그대로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의 흔적은커녕 짐승의 흔적도 없었다.


라온은 하슬라가 밖에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왠지 오늘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라온은 덩굴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면서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어제처럼 덩굴을 건드려 다시 크게 자란다면 하슬라가 나와도 보지 못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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