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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1화

by 백서향

"엄마, 엄마."

한 사내아이가 엉엉 울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쁜 꿈이라도 꾼 것일까. 반쯤 감긴 눈을 뜨려고 애쓰며 손등으로 눈을 비벼댔다.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맨발에 다 해진 옷을 입고 길을 헤매고 있었다. 입술은 부르터 있었고 얼굴은 땟국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길바닥의 흙은 다 말라가다 못해 발을 디딜 때마다 먼지를 일으켜 기침 하게 만들었다.. 비가 오지 않은 지 석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비구름은커녕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아이의 맨발은 긁히고 얽혀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꿈속이라고 착각하는 건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건지 아픈 줄도 모르고 등불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헉.


불빛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을 때 아이가 덩굴에 가로막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아이의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아이의 손가락만 한 가시가 박혀 있는 굵은 덩굴이 끝도 모르게 펼쳐져 있었다. 아이가 부딪힌 덩굴의 가지들이 순식간에 하늘을 향해 자라났다.


아이는 몸을 일으키며 부딪힌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가슴에 가시가 박히지는 않았다. 당황하지 않는 것을 보니 밤중에 이곳으로 온 것이 처음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등불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보라색으로 빛나는 등불을.


사내아이는 돌아가려 뒤를 돌려다 멈추고 빛이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별처럼 반짝이는 불빛들이 하나둘 흩날리더니 이내 모닥불처럼 솟구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모닥불처럼 보이던 불빛이 사그라들자, 여자아이 하나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여자아이는 손을 움직이며 작은 불빛들을 사방으로 흩어 놓기 시작했다. 최대한 멀리 보내려는지 동작이 커졌다.


빠직.


등불의 정체가 여자아이였다는 걸 알아차린 사내아이가 뒷걸음질 치다 나뭇가지를 밟았다. 고요하기만 했던 들판에 순식간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아이는 동작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두운 곳에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웠다.


사내아이의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등줄기에서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마에서 시작된 땀이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자아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누구야?"


여자아이의 몸에서 빛나고 있던 불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인간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아이는 천천히 다가가 덩굴을 사이에 두고 사내아이 앞에 섰다.


"인간의 땅에 있는 걸 보니……."


불빛이 없어지자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여자아이를 보자 긴장이 풀렸는지 사내아이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여자아이도 소리의 정체가 이 아이라는 것을 알고는 안심하는 눈치였다.


"인간이 금기의 땅까지 오다니. "


사내아이는 가끔 자다가 정신을 놓고 들판을 헤매다 덩굴에 걸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자신이 만질 때마다 순식간에 자라나는 덩굴이 무서워 항상 도망가곤 했었는데. 이곳이 금기의 땅이었다니.


"여기가 금기의 땅이야? 생명의 신이 산다는?"


긴장이 완전히 풀린 사내아이가 호기심 어린 두 눈으로 물었다.


"넌 내가 무섭지 않아?"


여자아이는 질문을 퍼붓는 사내아이가 신기해 보였다.


"무서워. 그런데 신기해. 궁금하기도 하고."


그제야 여자아이는 사내아이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여자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꺼지지 않고 남아 있던 불빛들이 조금씩 흩어졌다. 사내아이가 불빛이 흐트러질 때마다 황홀한 눈으로 쳐다보았고, 여자아이는 그런 사내아이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예뻐."


공포와 긴장이 사라진 사내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여자아이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보라색 불빛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크게 그리고 더 멀리 불빛을 만들어 사방으로 퍼트렸다. 주위가 조금씩 환해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는 푸르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사내아이가 사는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사내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들판 한쪽에 각종 열매가 달린 나무들이 줄줄이 늘어져 있었다. 과일을 먹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깔깔한 곡식으로 지은 밥이라도 얻어먹으면 다행이었다. 가끔 산에 올라갔다 개복숭아를 따먹은 적은 있었지만, 말라비틀어진 개복숭아는 떫고 시큼하기만 했다.


여자아이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나무를 쳐다보는 사내아이를 보다 덩굴 사이로 손을 넣었다. 보라색 불빛이 손끝에서 물결처럼 일랑이며 나오더니 덩굴 아래쪽으로 넓은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사내아이가 몸을 웅크려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었다.


사내아이는 한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금기의 땅이었다. 소문에는 그곳에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니 근처에 가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왜 안 들어와?"


"죽기 싫어서."


"뭐라고?"


여자아이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덩쿨을 바라만 보고 있는 사내아이의 손을 잡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어어."


사내아이가 덩쿨을 지나 푸른 들판 사이로 들어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기 않았다. 그제야 사내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들판을 가로질러 사과가 달린 나무를 향해 뛰었다.


빨갛게 익은 사과들이 빼곡히 매달려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사과들이 마치 별빛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사내아이는 손을 내밀어 사과를 톡 하고 건드려보았다. 사과가 흔들리며 향긋한 향기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사내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느긋하게 걸어오는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여자아이는 제 손에 닿는 작은 사과 하나를 따서 사내아이의 입에 밀어 넣었다. 자신도 모르게 사과를 씹어버린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사이로 흘러 들어온 과즙이 너무나 달콤했다. 사내아이의 황홀한 표정을 보고 있던 아이가 사과를 따기 시작했다.


"자, 이거 다 먹어."


사내아이의 발 아래 사과를 내려놓고는 아이는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내아이도 그 옆에 앉아 사과즙이 턱으로 흐르는지도 모르고 먹고 또 먹었다. 여자아이는 그런 사내아이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넌 이름이 뭐야?"


"난 라온. 넌?"


"난 하슬라야."


"나 여기 또 놀러 와도 돼?"


한참을 생각하던 하슬라가 입을 열었다.


"잘 가."


하슬라가 갑자기 일어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라온은 하슬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지만 일렁이는 보라색 머리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너무 아름답다고. 그리고 바랐다. 이 순간만큼은 꿈이 아니기를.


라온이 열려 있는 덩굴 사이를 빠져나온 후 주위에 있는 나뭇가지로 구멍을 안 보이게 가려 놓았다. 라온은 이곳을 기억하기 위해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피 묻은 옷을 찢어 살짝 보이게 하고는 다시 묻어버렸다. 그러고는 왔던 길을 되짚어 가면서 하나하나 머릿속에 넣었다.


오늘은 예전처럼 울면서 돌아가지 않았다.


'하슬라'


바람에 흩날리던 보라색 머리와 그 아이가 내뿜던 불빛들이 라온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는 세상이 더 이상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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