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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12화

by 백서향

무들의 집안은 대대로 무사였다. 비의 신이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을 때부터 가까웠던 집안이었다. 신이 인간 땅에서 인간의 제도와 규범을 그대로 가져와 나라를 세웠을 때 누구보다 불만이 가득했지만, 충성스러웠던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신을 지켜줬다.

"아버지 다녀오세요."


정원에서 책을 읽던 아란이 무들을 배웅하기 위해 웃으며 뛰어왔다. 아란의 모습을 아무 말없이 지켜보던 그는 아란의 두 어깨를 지긋이 잡아보고는 키를 가늠해 보았다.


"아란, 많이 자랐구나.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키도 제법 커지고 어깨도 넓어졌어."


웬만한 장정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단단한 어깨를 가진 무들의 눈에 아란은 그저 꼬맹이로 보였었다.


"그럼요. 이제 수염도 나려고 코 밑이 거뭇거뭇해지던걸요. 호호."


옆에서 어머니인 아리슬이 거들자, 아란은 인중을 만져보았다. 부모님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멋쩍어진 아란이 돌아가려던 찰나 무들이 그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오늘은 아버지와 같이 성에 가자."


"네? 성에요?"


아리슬도 아란도 그저 놀란 눈을 하고 무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그래, 너도 이제 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야 하지 않겠니. 부인 준비해 주시오."


무들은 말에 올라 아란을 제 앞에 태우고 고삐를 쥐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꾸만 뒤돌아보는 아들을 바라보던 아리슬은 잘 다녀오라는 손짓을 과장되게 흔들었다. 성 앞에 다다르자, 아란을 내려줄 것 같던 아버지는 아란을 태운 채 성 입구를 통과하면서 병사들에게 경례를 받았다.


"아란, 보거라. 이게 권력이라는 것이다. 가지고 있으면 군림할 수 있는 것, 가지면 가질수록 좋은 것."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이 얘기하는 아버지가 아란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날 아란은 기병대가 훈련하는 모습을 몇 시간이고 꼼작없이 지켜봐야 했다. 무사 집안에서 타고 자랐다고는 하지만 아란은 무사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가정교사와의 수업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즐기는 아란은 학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무들은 아란과 함께 나섰다. 풀이 죽은 아란을 보며 아리슬은 그저 토닥여 줄 뿐이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 아란이 더는 참지 못했는지 무들이 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화가 난 무들은 그 길로 아란의 방으로 향했다.


"무슨 짓이야. 이게!"


방이 울리도록 큰소리를 내는 아버지가 무서웠지만 아란은 정말로 성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무들은 책상 앞에 앉아서 돌아보지도 않고 있던 아란의 의자를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아란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순간 너무 놀란 아란이 딸국질을 시작했지만, 무들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가 지금 아버지의 말을 무사하는 거냐!"


화가 잔뜩 난 무들도 그런 아버지에게 놀란 아란도 입을 열 수가 없어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아버지였기에 아란은 꿈꾸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가지 않을 작정이냐?"


"아버지, 전 무사가 되고 싶지도 않고 성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아요."


아란은 이 한마디가 제 뜻을 아버지에게 비춘 마지막 말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무들의 두터운 손이 아란의 뺨에, 어깨에 날아들었고 그를 집어 들어 던지기 직전 아리슬이 달려와 무들을 말렸다.


아란도 아리슬도 무들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무들의 모습에 그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다만 씩씩거리며 화를 참던 무들이 방을 나가며 거칠게 문을 닫아버렸다.


나쁜 꿈을 꾼 것이라 치부해 버리라는 어머니의 말에 아란은 선명한 멍 자국을 보며 몸서리를 쳤다. 아란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단 한번의 폭력으로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자신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를 그리고 아버지가 없어질 때까지는 자신은 그를 거역할 수 없음을.



아란은 얼굴에 멍자국이 없어질때까지만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무들도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살갑던 부자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쁘지도 않았던 그들의 관계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 같았다.


그제야 무들이 성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유난히 예민했다는 게 기억났다. 폐하와 하에라의 얘기만 나오면 헛기침으로 중단시켰던 일도 자주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버지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아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시 아버지와 함께 성으로 들어가던 날 아란은 말을 타는 법을 배웠다. 몇 번이나 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무들의 아들이었던 그는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능숙하게 말을 몰게 되었다. 그 모습에 흡족해진 무들은 아란에게 자유 시간을 주었다. 그 후로 아란은 자유시간을 얻기 위해 기병장에서 훈련에 누구보다 열심히 임했다.


무들이 순찰을 나가고 폐하를 만나러 가는 시간은 늘 일정했다. 아란은 무들이 자리를 비우면 눈치껏 성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하에라를 만나 다과를 즐기며 게임을 하기도 했고,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읽기도 했다.


그날도 책에 한참 빠져 있던 아란이 배가 고파져 성 여기저기를 기웃대고 있었다. 그러다 하에라나 제나를 만나게 되면 빵이라도 달라고 할 셈이었다. 하지만 성 안에는 창을 들고 서있는 병사들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성 안을 모두 뒤져 본 아란은 3층에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주위를 살펴본 아란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계단을 올라갔다.


"에이,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복도를 끝에서 끝까지 훑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란이 다시 돌아나가려 하던 찰나 벽에서 나오는 손을 보고 기절할 듯 놀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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