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엄마는 7월에 퇴직을 앞두고 있다. 퇴직하시고 나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하고 싶다 하셨다. 내가 본 할아버지는 정말 말수가 없고, 하회탈 같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지켜봐 주시는 분이었다. 엄마말로는 할아버진 예전부터 과묵하셨고 엄마가 어렸을 때도 소리를 지르거나 흥분한 모습을 보이신적이 없었다고 한다. 술도 거의 드시지 않아 주정도 본 적 없다 하셨다. 할아버지는 귀가 많이 어두워 티비도 청각장애인용 자막을 이용하실 정도였는데, 그렇게 되면서부터는 더욱 말수가 없어지셨다. 그저 우리가 놀러 오면 멀리 앉아 이야기하는 우릴 가만 보시다 (들리지 않으니 정말 보시기만 하다) 조용히 나가 담배 한 대 피우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마켓에서 과자를 잔뜩 사 오셨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할머니로부터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거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최근 몇 년간 깜빡깜빡하셨고, 근 몇 달간은 가끔 이상한 이야기를 하셨지만 88세의 연세니 그럴 수 있다 생각하셨단다. 무엇보다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어 할머니와 함께 잘 지내셨다. 근데 최근 며칠 동안 갑자기 증상이 심해졌다. 그것도 피해망상 쪽으로. 할아버지를 괴롭힌 건 할머니가 물건을 훔쳐 내다 판다는 망상이다. 집에 있는 냉장고, 프라이팬, 심지어는 옷가지들까지 할머니가 어딘가에 팔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엄마와 삼촌들이 막상 "정확히 없어진 물건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명확히 대답은 못하시는데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며 역정을 내셨다. 단 한 번도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적 없던 할아버지는 결국 할머니에게 지팡이까지 휘두르며 집안에 물건을 훔치니 죽여버리겠다고 까지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두려움에 떨다 엄마에게 도와달라고 전화를 하신 거다. 엄마와 삼촌들이 급하게 청주로 향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지내기가 도저히 무서워 집에 못 들어가겠다고 하셨다. 다행히 내가 나와 살아 본가에 내 방이 비어있으니 할머니는 우리 집으로 오시기로 했다.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려 했지만 치매 판정 결과가 나와야 지원을 받을 수 있어 2~3일 정도는 혼자 계셔야 했다. 일단 집에 가정용 CCTV를 설치하고 삼촌들과 엄마가 돌아가며 매일 방문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엄마와 삼촌들은 혹여라도 사고가 나거나 밤중에 집을 나가실까 봐 하루종일 CCTV 만을 붙잡고 있었다. 할머니에 대한 망상만 빼면 할아버지는 대부분 괜찮았다. 식사도 직접 차려 드시고 나면 바로 설거지를 하고, 매일 씻고 정리를 하셨으며, 은행에도 직접 가 공과금도 내셨다. 그렇게 잘 지내시다가도 갑자기 망상에 꽂히면 현관문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도둑이 들어오는 걸 감시하거나, 주무실 때 머리맡에 망치 혹은 지팡이를 두고 주무셨다. 여전히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며 화를 내셨다. 귀가 어두워 초인종 소리를 못 들으셨는데, 현관문에 이중 삼중으로 잠금장치를 다 걸어놔 번호키를 누르는 것도 소용이 없었다. 삼촌들이 베란다 창문으로 동전을 던져 할아버지가 그걸 보고 나와 문을 열어주셔야 했다. 할아버지가 매일 끼고 다니시던 금반지가 있는데 치매 증세가 심해지자 잃어버릴까 봐 할머니가 빼놓으라 하니 금반지도 팔려고 하는 거냐며 절대 못준다고 하셨단다. 결국 큰삼촌이 "아버지 나 이거 반지 갖고 싶어, 나 주면 안 돼?"라고 하시니 바로 "어 너 가져도 되지, 너 줄게" 라며 빼주셨다. 삼촌은 반지를 받곤 한동안 울었다 했고, 나도 이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났다. 할머니는 내게 애들이 어릴 적 자기는 성격이 급해서 화도 내고 소리도 지르는데,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애들을 너무나 귀하게 여겨 그러지 말라고 나무르는 분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딸들은 공부 안 시키는 집도 많았는데 할아버지는 첫째인 우리 엄말 대학까지 다 보내고 하고 싶은 거 하라 하시는 분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치매로 인해 변하니 가족 모두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내게 할아버지 할머니와 여행을 가려던 건 다 글렀다고, 자신이 시간이 나니 이제 부모님이 너무 늙어버렸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의 엄마답게, 이럴 때일수록 신세한탄 할 때가 아니고 정신을 똑바로 차려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먹자 하셨다. 우리 집안은 흔들리지만 세상은 잘도 돌아가서 그 사이에도 우린 모두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엄마 아빠가 치매에 걸리거나 아프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거 같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어른이 되면 세상의 순리 같은,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이게 되는 걸까? 병에 걸린다는 것, 그건 덫에 걸리는 것처럼 발목이 잡힌다는 것. 치매에 걸린다는 것. 그건 남은 할아버지의 날을 치매가 많이도 뺏어갈지 모른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