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내가 있잖아
환자도 없는 춥고 어두운 저녁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 아직 퇴근 시간은 아니지만 서둘러 퇴근 준비를 했다. 더 기다려봐야 환자는 안 올 테고 나도 '안 기다려줘' 하는 마음으로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는데 한의원문이 더러럭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처 가운을 입을 새도 없이 나가보니 오래전부터 오시는 35년생 소녀 같은 할머니시다. 귀가 잘 들리질 않아 대화가 힘들 때도 있지만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으실 때는 귀여운 웃음으로 넘어가신다.
후다닥 가운을 입고 할머니께 진료받을 자리를 안내하고 어디가 불편하신지를 여쭤보니 작년에 다쳤던 갈비뼈 부위가 오늘 담 결린 듯 아프다고 하신다. 몸을 따뜻하게 해 드리고 몇 마디 대화가 오갔다. "원장님, 환자가 왜 없어?" "어머님, 요즘 코로나 때문에 그러네요."
"뭐라고??" 자랑도 아닌데 "날씨가 추워서 환자분들이 잘 안 나오시네요" 몸에 힘을 주어 다시 말씀드렸다.
"환자가 없어?" 어머님 목소리도 덩달아 커진다. "네~~"
치료를 다 받고 진료비를 내시려고 할 때, 할머니의 돈가방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직원도 일찍 퇴근을 시킨 터라 나만 한의원에 있었고 할머니가 오실 때는 다른 환자분들도 없었기에 누군가가 가져갈 리는 없었다.
할머니는 당황스러움과 돈가방이 없어졌다는 생각에 울기 시작하셨다. "아이고 어째, 가방에 돈도 많이 들었고 집 열쇠도 있는데, 아까 남자들이 길거리에 많던데 가져간 거 아니야?"
내가 진정시켜보려고 했지만 어린 아이처럼 털썩 주저앉아 '어떡해 원장님'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계신다.
나도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일단 할머니의 따님한테 전화를 했다. 그 따님은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본 사람처럼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데, 전화를 받은 할머니는 딸의 이름을 부르면서 "미래야 나 집에도 못 가고 돈도 잃어버렸어. 어떡해?" 하며 우신다. 돈가방을 집에서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게 분명해 보이는데 내 말은 안 들리는지, 들으려 하시질 않는다. 간신히 딸이 전화상으로 "엄마 그러지 말고 집에 가세요. 그러고 있음 어떡해?" 떼쓰는 아이를 달래다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얘기를 하니 할머니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신다. "아이고 나 어떡해" 하시면서 나가는 할머니의 축 져진 뒷모습이 애처롭다 못해 보듬어 주고 싶었다.
연세가 많이 드신 환자분들을 보면서 가끔 나의 부모님이 떠오를떄가 많다. 내가 비행기 조종석의 수많은 버튼을 보며 느끼는 놀라움처럼 스마트폰 사용을 엄마는 어려워하시고, 인터넷이니 와이파이, 새벽 배송 같은 간편한 서비스를 받아들이는데 익숙지 않으시다. 김장하실 때 새벽 배송으로 배추와 다른 김장거리들을 주문했을 때 세상 참 편한 이런 세상에 오래 살고 싶다고 하셨다. 하지만 몸과 정신은 약해지기 마련, 환자처럼 깜빡하고 지갑을 집에다 두고 온 것 자체를 깜빡해서 당황을 하는 일이 종종 있다.
부모님 집에 가게 되면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틀어놓고 트로트에 푹 빠져 계속 보고 있는 모습에 첫날은 조금 힘들다. 몇 번 보셨을 재방송인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좋아하시면서 나에게 가수의 외모나 히트한 노래들에 대해서 반복해서 얘기하신다. 이런 모습에 익숙해질 즈음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다. 대지처럼 우리를 보살폈던 엄마가 아니라 이젠 우리가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 걱정하고 돌보는 입장이 되었다. 관광버스 앞에서 영화배우처럼 포즈를 잡았던 아빠, 예쁜 원피스를 입고 날씬한 다리를 뽐내며 찍었던 사진속의 엄마가 더이상 아닌것이 분명했다. 뒤바뀐 처지지만 부모님께 자식의 보살핌을 누려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다음날 한의원에 오신 할머니는 돈과 열쇠가 든 가방을 거실 탁자에 두고 나왔었다고 하시면서 소녀처럼 환하게 웃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