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민족의 후예
게으름이 배고픔을 이기는 자와 배고픔이 게으름을 이기는 자.
나는 게으름이 배고픔을 이기는 자인데... 다른 일에 부지런 떠는 나를 보면 다들 이해할 수 없는 부분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이상하게 나 혼자 뭔가를 먹기 위해 어마어마한 조리과정을 거쳐 한 끼를 먹고, 그걸 또 치우는 일을 잘하지 않게 된다. 한마디로 가성비가 제로다. 게다가 난 지금 당장 쓰지 않을 음식 재료로 냉장고를 꽉꽉 채워두는 것 자체가 싫다. 엄마와 내가 늘 부딪히는 바로 그 지점. 이거 대체 언제 먹을 꺼야?
그러나, 그것도 옛이야기고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하는 진짜 집순이가 되고 보니 삼시 세 끼를 집에서 해결해야 하는 삼순이가 되었다. 지난 일주일 내가 혼자 먹은 것이라고는 햇반 두 개, 컵라면 두 개, 동생이 와서 먹은 피자 두 조각, 복숭아 한 개, 포도 한 송이가 전부다. 조금 먹었다는 소리가 아니고 움직일 만큼만 대강 먹고살았다. 냉장고는 엄마의 식재료로 가득하지만, 엄마와 나는 음식을 하는 방법도 메뉴도 식재료를 정리해두는 방식도 달라서 그 냉장고는 나에게는 던전이나 다름없다. 뭘 찾아서 해 먹으려면 재료 파악과 정리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 그걸 언제 해... 그냥 엄마가 와서 해주고 냉장고를 비워주는 것이 훨씬 간단한 일이지. (ㅎㅎ;;)
여튼 오늘도 일찍 깨서 휘적휘적 돌아다니다가 누워있었는데, 굴삭기 사장님이 오셨다. 너무 일찍 오셔서 벨도 못 누르시고 조심스레 전화하셔서 부르시길래 냉큼 나가서 하고 싶은 것들 상의를 하고 돌아왔더니 기운이 쏙 빠져서 이대로는 죽겠다 싶었다. 살이라도 이쁘게 빠지면 이대로 굶어볼 텐데 거울 보니 할머니가 한 분 계셔서 안되겠다. 먹어야 해....
그래서 일단 반조리 식품을 배송해주는 마켓에서 몇 가지 시키고, 관리식단 도시락을 6개 배송시켰다. 도시락 6개에 23,000원이니 내가 해먹는 것보다 진짜 훨씬 낫지 뭐.
분명 어릴 때 미래세계에서는 알약 하나 먹고 배부르게 살 수 있다고 했었다. 내가 책에서 분명 봤다고!! 그러나 2020년 원더키디의 배경이 되는 2020년을 살고 있는데도 아직 그런 것은 나오지 않았고, 요즘 사람들은 더더더 복잡한 음식을 잘도 해먹고 그걸로 콘텐츠를 만들어 돈을 벌고 산다. 음식으로 새로운 산업이 생겼으니 알약 하나만 먹어도 되는 세상은 당분간 오지 않을 것 같고, 그 대신 발단된 배달 시스템을 잘 활용해 보기로 했다. 배달민족의 후예답게!
제대로 된 음식이야 뭐... 친구들이 왔을 때, 혹은 시간과 공을 들여 나에게 한상 차려주고 싶을 때만 해도 되지 않나 싶다. 그때그때 장 봐서.
그럼에도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쓰레기도 버리고 빵도 사고 다이소에서 창틀 물구멍에 붙이는 방충망 스티커도 사러 나가야 하는데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당 밖이 지옥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나가기가 싫은 것인가! 역시 집순이는 누군가가 불러줘야 한다. ㅋㅋㅋ 집순이 활용법을 너무 잘 알던 언니오빠들이 그립구만. 그때는 진짜 귀찮았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