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카페용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셨을 때의 짜릿함을 잊지 못한다. 작은 종이컵에 담긴 자판기 믹스커피가 아닌, 플라스틱 뚜껑에 홀더까지 제대로 갖춰진 일회용 컵에 담긴 쓰디쓴 아메리카노는 또 하나의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놀라운 아이디어였고 탁월한 브랜딩이었다. 가벼워 보이는 일상의 루틴 안에서 프리미엄을 창조해낸 것이라고 여겼다. 커피를 들고 다니며 마시는 게 가능하다는 걸 왜 이전에는 몰랐을까. 없을 땐 모르고 지냈지만 한 번 맛을 보면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건 커피나 스마트폰이나 매한가지다.
일회용 컵은 정말 대단한 발명품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엔 특정 글로벌 브랜드의 전유물이었던 그것이 점차 온 동네를 카페로 물들이며 진화해나가기 시작했다. 컬러와 그래픽으로 디자인을 뽐내는 도구가 되었고 컵을 두 개 겹치거나 다회용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크고 긴 사이즈로 온갖 아이디어를 뽐내는 장이 되었다. 누가누가 더 그럴싸한 갖고 싶은 일회용 컵을 만드나 내기하듯 현란한 외모 경쟁이 오갔지만 승자는 없었다. 쓰임을 다하면 길거리 어딘가에 처절하게 버려진 채로 기약도 없이 사라지지 못하는 신세가 되는 건 1등도 예외가 없었다. 오히려 많이 사랑받을수록 더 많이 버려졌으니, 하루살이보다 더 짧은 일회용 컵의 운명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이 그럴싸하고 편리한 습관은 한 번 맛보면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다. 아침에 집에서 가볍게 나가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회사, 학교, 약속 장소 등으로 향하는 그 달콤함은 그 어떤 시럽보다 당도가 높다. 일회용 컵이 사라지는 건 모두에게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불편함을 선사한다.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설거지라는 귀찮고 무거운 일과가 추가되고 그만큼 시간 대비 더 팔 수 있는 커피잔의 수는 줄어든다. 포장은 고급스러우나 현실은 박리다매인 콘텐츠의 매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카페 손님에게는 곳곳의 상황에서 더 다양한 불편함이 스며든다. 매장 안에서 음료를 마시다가 가지고 나갈 수 없고, 텀블러를 들고 다닐 경우 무거운 짐과 설거지는 내 몫이 된다. 외출할 때도 잊지 말고 챙겨야 하는 물건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니 정신도 귀찮아진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여러 명이 한꺼번에 주문해 마시던 커피 문화도 사라진다. 커피를 쏘고 싶어도 쏠 수 없고 그렇다고 한 명이 일일이 개인컵을 수거해 담아오기도 불편해진다. 편의로 누리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일회용 컵이 사라질 경우 생기는 편의라고는 고작 개인컵으로 받는 몇 백원의 할인 혜택과 미세 플라스틱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건강함뿐이다. 거리에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도 있긴 하지만 크게 와닿는 건 아니다. 하루에도 일회용 컵을 몇 개씩 쓰며 누리는 편의와 맞바꿀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건 없다. 세탁기에 건조기까지 쓰며 살다가 냇가에서 빨래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식기세척기가 다 해주는 걸 마다하고 설거지옥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진짜 좋은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눈앞에 편의는 차마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이젠 너무도 당연해서 유혹으로도 느끼지 않는다는 게 맹점이지만.
그런데 우리는 잘 살고 있나. 풍요롭나. 기계와 쓰레기가 주는 풍요 말고 내적으로 풍요로운가 묻고 싶다. 모든 걸 다 떠먹여주는 편의의 세상은 왜 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더 암울해지게 만들고 있는 걸까. 시간을 쪼개어 쉼 없이 달리는데 왜 모든 것은 더 더럽고 위험하고 불확실해지기만 하는 걸까. 불공정해지는 걸까. 불평등해지는 걸까. 혐오스러워지는 걸까.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모든 걸 마음대로 다 할 수는 없는 거야."
내가 요즘 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아직 세상 경험이 적은 아기는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왜 위험한지, 물건을 던지는 것과 친구를 때리는 게 왜 나쁜 건지, 왜 시간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왜 안 되는 것이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말한다.
"네가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고 다른 친구를 아프게 하지 않고 약속을 잘 지키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아이는 되묻는다.
"엄마 이거 해도 돼요?"
이건 아이를 억압하는 게 아니다. 아이는 엄마의 결정을 믿고 책임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시기이기에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그럼 난 일관된 기준 안에서 해도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해 준다.
한정된 환경 안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아이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몰라도 되는 건 아니다. 어렴풋하게 인지하더라도 지금부터 배워야 한다. 아마도 나는 이 말을 앞으로도 백번 아니 천 번쯤은 더 하게 되겠지. 아이가 뜻을 이해하고 지킬 수 있게 되는 나이가 될 때까지.
책임지지 않는 행동을 누리는 건 자유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빼앗은 풍요는 정당하지 못하고 '라이프스타일'이나 '문화'라는 이름으로 치장할 수 없다. 나의 편의와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미를 꾸미는 일은 결국 다시 내게 돌아와 나를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게 된 건 다가올 6월 1일부터 시행 예정이었던 일회용 컵 보증제가 소상공인들의 반발을 이유로 무산되고 12월로 미뤄졌기 때문이다.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의 불만 섞인 토로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12년 만에 부활하는 이 제도가 이렇게 쉽게 '유예'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게 될 줄 몰랐다. 그리고 유예의 핵심엔 고통을 분담하지 않는 프랜차이즈 본사와 환경에 무심한 국가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상공인의 반발을 명분 삼고 있지만 애초에 그들을 더 힘들게 한 건 누구였을까. 벗어날 수 없는 시스템 속에 몰아넣고 이득만 챙긴 건 누구였을까.
한때 내 눈을 반짝거리게 했던 일회용 컵은 이제 내 눈을 돌리게 만드는 보기 싫은 쓰레기가 되었다. 감각적인 디자인을 뽐내며 브랜딩 하는 기업도, 당연하듯 일회용 컵을 건네는 매장도,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니며 sns에 인증하는 사람들도 모두 각자 자기만큼의 책임을 쏙 뺀 허상을 쫓는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걸 다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