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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Dec 09. 2022

소신은 일상이다.



소신 있는 사람은 보통 멋진 사람이다. 남들의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자기의 가치관을 굳건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 소신 있는 사람이야.'라는 말은 대게는 칭찬이다. 하지만, 유퀴즈에 나올법한 사람의 소신을 바라보는 우리의 흐뭇함과는 별개로 일상 안에서 지인, 친구, 가족의 소신은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남들 다 사는 대로 살면 되는데 모나게 유난 부리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소신의 포지션.


좀 일찍부터 소신을 가졌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도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 세상에 부딪혀 힘든 건 전부다 내가 세상에 적응 못한 결과값인줄만 알았다. 세상이 잘못된 거라는 생각을 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는 왜 이 세상에서 당당히 모든 일을 헤쳐나갈 만큼 단단하지 않은가. 나의 부족함을 가리고 버리고 채워 넣는 데에만 급급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을 이렇게 저렇게 포장해 봤지만, 결국 알맹이는 '남들만큼 사는' 것이었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인생을 살아가는 길잡이가 될 만큼 강력한 것인지. 별것 아닌 우스운 것들이지만 여전히 불특정 다수의 그 '남들'에게서 완벽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프리랜서가 되며 나의 시간은 보다 자유로워졌고 눈치 보며 책상에 앉아있을 필요는 없어졌지만 그만큼 스스로 조절해야 할 책임이 생겼다. 아이를 키우며 누군가 나에게 시키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내가 주도해야 할 일과 생각과 방향들이 많아졌다. 막막하고 쉽게 흔들리는 망망대해에 작은 배 한 척을 띄워놓고 나만 바라보는 아기를 지키기 위해 파도에 맞서며 노를 저어야 하는 거대하고도 나약한 엄마라는 자리. 당황스러웠지만 피할 수 없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지만 어디로든 가야 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망연자실하던 그때 나의 작은 아기는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엄마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을까요?', '엄마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거예요?', '내가 엄마만큼 어른이 되었을 때 휘몰아치는 태풍과 두려움이 일상이 되면 어떡하죠?'. 어느 날 떠오른 이런 생각들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이가 이끌어낸 삶이 무의식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작고 작은 생각들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했다. 앞을 바라보니 가야 할 곳이 보였다. 그곳은 파도의 방향과는 달랐지만, 내가 가야 할 곳이라는 힘찬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노를 저었다.

반대로 노를 젓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건 한 번에 힘을 모아 헤쳐나가야 할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 물밀듯이 밀려오는 일상이었다. 매일의 쓰레기, 순간의 선택, 바라보는 시선의 모든 것이었다. 온몸을 다해 노를 젓다가 누군가와 자꾸 부딪혔는데 그들은 파도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었다. 흘러가는 대로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역행은 거슬림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눈빛에서 불편함과 짠함을 동시에 느꼈다. 가끔은 지치고 힘들었다. 더 중요한 걸 놓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여전히 그렇다. 정답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이 맞고 내가 틀린 줄만 알던 시절처럼 움츠러들지는 않는다. 나는 그때보다 나이를 먹었고 단단해졌으며 엄마가 되었다. 내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내가 무엇 못할까. 그렇다고 아이만을 위한 건 아니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 것에 이보다 더 충만했던 적이 없다. 이보다 더 가벼웠던 적이 없다. 이렇게 '남들'에게 얽매이지 않았던 적이 없다. 적당히 타협하는 순간들조차 내가 잡은 키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 내게는 힘이 된다.


내가 말하는 소신은 정말 작은 것들이다. 배달 음식을 시키지 않는 것,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것, 아이에게 미디어를 노출하지 않는 것, 가공식품을 많이 먹이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다. 정말 소소하지 않은가. 한순간 버리고자 하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작은 것들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것들이디. 지키고자 하면 조금 불편할 수 있지만 없다고 생각하면 그리 불편하지도 않은 것들. 아이에게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대단하다'는 것인데, 난 한 번도 대단한 무언가를 한 적이 없다. 그게 당연해서 그렇게 했을 뿐인데 밥 먹다 식당을 돌아보면 우리 아이만 아무것도 안 보고 있을 뿐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급물살을 언제 이렇게 다들 빠르게 탄 건지 의아할 뿐이다. 


모든 것이 그런 식이다. 시비를 걸자고 들면 얼마든지 유난 투성이인 나의 일상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드는 순간까지 모든 게 유별난 것 같지만 정작 나의 일상은 그저 평범하고 수수하다. 화려한 새 물건을 사지 않을 뿐이고 스마트폰에 배달 어플이 없을 뿐이다. 고기만두 대신 비건 만두 먹고 제로 웨이스트 숍 좀 가는 게 뭐 그렇게 특별한 일인가. 누군가의 특별한 취향은 잘도 탐닉하면서 가치관은 왜 그렇게 낯설게 바라보는 것일까. 가치관이 내가 잘 모르는 유명인의 전시품인 것처럼.


파도의 반대 방향으로 노를 저어야 하는 건 몸이 힘든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마음의 품이 드는 일이다. 그걸 지키는 마음은 정말로 거대하다. 난 내 마음의 영웅이 될 거다. 때론 흔들리고 때론 지치겠지만 욕망이 만든 세상의 파도에 정처 없이 흘러가지는 않을 거다. 


스스로 다짐하려고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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