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커피를 마신 기간은 아주 오래되었다. 첫 순간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공부의 피로를 달래고 쏟아지는 잠에서 탈출하기 위해 레쓰비를 마신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되어 학교 앞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 로즈버드의 라떼를 즐겨마셨다. 그때부터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을 썼던 것 같은데 돌이켜보니 나도 정말 많은 일회용 컵을 썼다. 푹신하고 화려한 소파에 앉아 헤이즐넛을 마셨던 기억도 있다. 프라페와 빙수를 파는 그런 곳.
디자인실에서 막내로 일할 땐 아침마다 시간 맞춰 팀장님의 믹스커피를 타서 갖다 바치는 게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종이컵 무늬를 가리키며 어느 부분까지 물을 따라야 하는지 지정해 주었던 그녀. 한동안 난 그녀와 같은 성을 가진 모든 사람을 싫어했다.
트렌드 분석과 컨설팅 일을 하면서 본격 스타벅스 생활을 시작했고 클라이언트와 대화 중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는 장소가 어디냐는 말에 스타벅스를 답했던 기억도 있다. 커피는 카페인이 필요해서 시작했지만 환상과 로망이 되어 브랜드로 소비하다 결국엔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프랜차이즈의 뻔함에 질릴 때쯤 핫한 카페를 찾아다니는 커피 생활을 즐겼다. 감각적인 공간의 분위기를 즐겼고
작은 잔에 담겨 나오는 커피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걸 인스타에 올리는 맛 또한 꽤나 쏠쏠했다. 앤트러사이트 서교점의 드립커피는 나에게 최고의 쾌락이었다. 점원의 속삭이는 듯한 데시벨과는 별개로.
감각적인 분위기도 비슷비슷해지고 대형 카페에는 별 매력을 못 느끼던 나의 취향은 환경에 대한 관심과 버무려졌다. 동네의 오트 라떼를 파는 적당히 심플한 카페를 좋아하게 되었고 여전히 일할 땐 스타벅스를 애용 중이며 유기농 원두를 중배전으로 주문해 먹는 지금이 되었다. 이제는 아주 고소한 오트 라떼에 쾌락을 느낀다. 테일러 커피와 블루보틀의 아이스 오트라떼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하는 고소함이다.
커피의 높은 탄소발자국을 알면서도 끝끝내 끊지 못하고 이런 글을 늘어놓을 정도로 내 몸에 흘러들어 간 커피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그만큼이나 길고 많고 오래되어 인이 배길 정도로 단단한 루틴이 된 것이다. 나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를 함께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필요와 기호가 만나는 것만큼이나 강력한 건 없으니까.
커피 자체가 환경에 좋지 않은 작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보카도, 팜유가 안 좋은 게 아니라, 지구가 감당 못할 만큼 지구인들이 한꺼번에 너무 빠른 속도로 먹어치우기 때문에 어떤 작물도 생존으로부터 버텨내지 못하는 거다. 커피콩이 자라나는 지역은 극히 일부이고 시간이 필요한 일인데, 커피는 점점 더 범지구적인 문화이자 일상이 되어버려 초토화되고 있는 중이다.
커피의 실질적인 탄소발자국이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커피 1kg당 탄소 배출량은 15.3kg이다. 감이 잘 안 와서 탄소 배출량이 많은 육식과 비교를 해보았다. 소고기가 26.5kg, 돼지고기 4-11kg, 가금류 2-6kg으로 나타났다. 똑같은 무게일 경우 돼지고기나 닭고기보다 탄소 배출량이 많다. 하지만 한 번에 1인분의 고기를 먹는 양은 당연히 잔의 커피보다는 월등히 많다.
그래서 1인분의 고기 200g과 1잔의 아메리카노로 계산을 해보았다. 소고기 1인분 5.3kg, 돼지고기 1인분 800g-2.2kg, 닭고기 1인분 400g-1.2kg, 아메리카노 1잔은 21g이다. 고기를 일주일에 한 번 먹는다면 앞에 나열된 숫자와 같고 커피를 보통 하루에 두 잔 마신다고 가정했을 때 일주일에 14잔이면 294g이다. 식후에 꼬박 마신다고 가정해 3잔으로 계산하면 일주일에 21잔이고 탄소 배출량 441g이다. 여기에 샷추가 하거나 빅 사이즈를 마시거나 커피가 들어간 간식을 먹거나 등등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보면 5-600g이 넘을 수도 있다. 커피를 많이 그리고 자주 마시면, 일주일에 한 번 닭고기 1인분을 먹는 것과 비교될 정도로 많은 양의 탄소를 배출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커피는 아보카도처럼 재배하는데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해서 주변 지역에 가뭄을 초래하고 있으며 지구온난화로 인해 재배 가능 지역과 콩의 종류 역시 점점 변화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위기에 빠진 먹거리에 대해 다루는 '내일은 못 먹을지도 몰라'라는 책의 리스트에도 커피가 있다. 내가 따로 줄이지 않아도 어차피 곧 못 먹는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커피를 못 끊는 나. 이 글은 그 누구를 저격하는 것이 아닌 오롯이 나를 향한 고해성사다. 징글징글하게 마셔대는 탓에 커피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눈 질끈 감고 외면하고 싶었다. 정면으로 마주한다고 해도 마시지 않는 것 외에는 딱히 대안도 없으니까. 하지만 한 번은 마주 봐야겠다 싶었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길이 보일지 누가 알겠는가.
연남동 지구샵에 갈 땐 보리커피를 사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