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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Jan 18. 2023

그렇다고 아무도 안 만날 순 없잖아.



세상에서 가장 살기 편한 방식은 내 주변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사는 거다. 남들처럼 크게 유난 떨지 않고 모나지 않게 특별한 소신이나 가치관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대세를 따르는 것. 그럼 적어도 남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들을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살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걸. 무언가 빠진듯한 마음의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인간이란 끊임없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게 본능인데 바로 그 알맹이가 빠져버린 기분에 휩싸였다. 허기는 원래 새로운 소비로 채우는 게 가장 빠른 해결법인데 이것만큼은 그렇게 해결할 수 없는 다른 결이었다. 어차피 허겁지겁 채운 소비는 소화가 금방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도 하고.



"너도 좀 너만의 인생을 살아봐."

"도전을 해봐."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봐."

"시야를 넓혀봐."



사람은 참 아이러니하지. 유난 떨면 고집스럽다고 그렇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흘러가는 대로 살면 그것대로 간섭하고 싶어 한다. 애초에 남들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던 거다. 신경 끄고 내 갈 길 가는 게 가장 속 편한 길이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남들이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가벼운 말들에 왜 그렇게 휘둘렸는지 모르겠다. 내 목소리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타인의 말들은 점점 내 시야에서 흐려지고 사소해져 금세 날아가버린다.


친환경 라이프는 내게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나아가야 할 방향이 생겼다는 것이 마음에 넘치는 풍요를 주었다. 선명하게 마음에 확신을 주는 가치관을 품게 되어 기뻤다. 그대로 직진하고 싶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속도로처럼 빠르게 달려가고 싶었다. 주저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니었다. 앞에도 사람, 옆에도 사람, 뒤에도 사람이 있다. 꽉 막힌 도로에 내비게이션도 없는 현실은 내게 지름길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아는 길도 돌아가게 만들었다. 아니 왜 삶을 좋은 방향으로 트는데도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고구마 100개를 먹은 것 같았다.


제로웨이스트나 비건을 실천할 때 가장 불편한 점은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무거움도 아니고 고기를 먹지 못하는 아쉬움도 아니다. 가장 힘든 건 사람이다. 사람과 함께 사는 것, 사람을 만나는 것, 사람을 만나 밥을 먹는 것, 선물을 받는 것 등등. 실천의 불완전함은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난다. 혼자 살면서 아무도 안 만나면 정말 완벽한 제로웨이스트와 비건을 할 수 있을 텐데.. 집 안의 살림부터 평소 가지고 다니는 것, 단골 식당 등 모든 상황을 나에게 맞춰놓으면 불편함 없이 만족스럽게 나의 실천을 완성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다. 내겐 남편이 있고 아이를 키워야 하고 부모가 있고 친구, 지인, 친척, 이웃 등 실천의 방해꾼들이 내 생활 반경에 다채롭게 포진하고 있다. 남편과 아이가 있는 내 가정 안에서는 그래도 괜찮다. 큰 틀의 생활방식을 내가 꾸려가고 있고 남편과의 타협점도 여러 차례의 투닥거림 끝에 어느 정도는 균형을 찾았다. 남편이 아이를 혼자 케어할 때 물티슈를 쓰거나 배달 음식을 시키는 일이 없고 36개월 꼬맹이는 식당에서 종이컵 쓰는 외할아버지에게 "식당에서 종이컵 쓰면 안 되는데.."라고 잔소리한다.


하지만 자연인 가족처럼 우리끼리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하나 건너 친구네 가족, 남편 친구네 가족, 사촌 네 가족 등 친한 사람과 하나 건너 덜 친한 사람이 묶여 있는 가족 단위의 만남이 되었을 때 나의 실천은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아이가 있으니 이런 만남이 잦아진다.) 친한 친구들과의 연말 모임에 비건 피자를 사갔고 친구가 준비한 떡볶이와 함께 나눠 먹었다. 커피 티백을 가져온 친구가 타준 커피도 마셨다. 그 정도는 괜찮았다. 선방했다고 생각했다. 


친척 집들이엔 대나무 휴지와 키친타월, 설거지 비누와 천연 수세미를 준비했고 배달 음식을 대접받았다. 고기만 먹지 말자 했지만 고기가 아닌 것이 없었다. 다 먹기가 힘들어 남편에게 덜어주다 남겼다. 남기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고기를 먹은 나를 '불완전 비건 지향자'라고 말하고 다니는 건 완전 모순 아닌가. 나는 나의 모순이 내 몸을 감싸는 듯했다.


사소한 건 하나에 예민해질 틈이 없는 상황도 있다. 전쟁터의 화살이 여기저기서 날아오면 어느 하나만 매의 눈으로 노려볼 여유가 없다. 정신 차려 보니 온갖 쓰레기 더미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했다. 배달 음식을 시키는데 해물찜이 괜찮냐고 물어봤다. 나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타인의 선택까지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어서 알아서 하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그 메뉴를 고른 것이었다.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해물찜은 먹어도 되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다 "너무 길어지는 이야기라.."라고 말 끝을 흐렸다. 여러 사람이 떠드는 분위기라 진지한 이야기를 해도 집중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자칫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처럼 느껴질 수 있는, 말해봤자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이야기들의 보따리를 애써서 풀어놓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친한 친구들조차 비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한 적이 없다. 만나도 보통은 사는데 힘든 이야기, 육아 이야기를 하느라 바빠서 나조차 자세히 이야기할 틈이 없었다. 그냥 순간순간 우유 안 먹는다, 고기 안 먹는다 이런 말을 했고 비건이 머릿속에 없는 친구들은 내가 뭘 먹고 안 먹는다는 건지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지지는 않으니 매번 물어보는 식이다. 결국 나는 선택한 적이 없지만, 배달 음식과 육식과 물티슈의 중심에 앉아있었다.


좋은 사람들이다. 친구나, 친구의 가족이나, 친척들이나 모두 서로를 배려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고 오래된 관계다. 이들을 계속 만나면 계속 이런 식일 텐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관계를 끊어야 할까.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할까. 그렇게 나만 완벽해지면 괜찮을까. 내 마음은 편해질까. 만남 이후 잔상이 남아 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내가 너무 나의 가치관을 표현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내가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실천했다면 어떨까. 나를 자책해 보기도 했다. 다음 만남을 이야기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그렇다고 사람을 안 만날 순 없지 않은가. 내가 원하는 가치관의 사람만 골라서 만날 수도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인연들을 저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게 해결책도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없는 마음의 소용돌이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행주를 쓰지 않는 친구네 방문할 땐 내 행주를 가져가서 써야겠다. 행주를 쓰라고 강요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가 내 실천만큼은 유지할 수 있을 테니. 그 순간에 물티슈 한두 장만큼은 덜 쓸 테니. 그걸 보다가 친구가 행주를 써보고 싶다고 하면 주고 와야지. 그 정도는 괜찮겠지.


물티슈를 쓰는 친구에게 쓰지 말라고 강요할 순 없지만, 내가 물티슈를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더 알리고 늘 행주가 준비된 사람 정도는 되고 싶다. 즉흥적인 만남보다는 계획된 소비에 집중하고 싶다.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을 늘리고 그들과 함께 친환경이 대세가 되도록 문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더 나아가고 싶다. 제자리에 있는 것이 꾸준한 개인의 실천에는 좋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환경에 유해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러니 나는 어떻게든 앞을 향해 발을 떼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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