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던 나의 유아기 시절 일화가 하나 있다. 너무 얌전하고 숫기가 없어서 머리 위에 핀을 올려놔도 가만히 두고 치우지 않았다는 이야기. 나는 그렇게나 낯가리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쯤이었나. 뉴스에서 넥타이 맨 아저씨들이 여럿 모여 구호를 외치를 장면을 보았다. 직장에서 발표, 회의, 사교 등을 어려워하는 직장인들의 자신감을 회복시켜주고 사회생활을 돕는 학원이 생겼다는 소식이었다. 그땐 그게 사회적인 이슈였는데 그걸 바라는 나의 마음은 ‘나도 저렇게 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학교에 가고 직장에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은 즐겁기도 했지만 상처도 많이 받았다. 전반적으로 쉽지 않았다. 소통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이 나를 향해 던지는 일방적인 편향이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나의 힘듦은 언제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세상의 잘못은 아닌듯했다. 모두가 세상에 맞춰 살아가고 있었으니 그게 잘못되었든 아니든 진리임은 분명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대단한 인싸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주변과 무난하게 잘 지냈다. 적당히 말을 잘 들었고 혼나면 따르고 순종했으며 무언가 충돌이 생기면 나의 부족함을 되돌아보았다. 어떻게 해야 세상에 잘 맞춰진 내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성장이라고 여겼다. 그게 나를 갉아먹고 나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은 서른이 지나서야 인지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거나 내 가치관을 세워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왜 무례한 언행들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까. 왜 조금 더 일찍 단단한 내가 되지 못했을까.
후회의 시간이 흐른 후 내린 결론은 건강하고 예민한 내가 되자는 다짐이었다. 내가 바라는 예민함이란 누군가를 생채기 내는 뾰족함이 아니라, 외부적인 요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내 안의 기준을 세우는 섬세함이다. 나는 나 자신을 섬세하게 세공하고프다.
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엄마는 너에게 사랑을 듬뿍 줄 테니 그 사랑 가지고 세상에 나가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라고. 올바르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아이가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한 것인데 말하다 보니 나 자신에게도 해주고 싶어졌다. 나를 사랑하는 단단함만이 세상에 나가 상처 주고받지 않으며 균형 있게 잘 지낼 수 있는 디딤돌이 되는 게 아닐까.
건강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면 자연스레 만남도 건강해진다. 나도 상대도 모두 지키는 그런 만남이라면 좋겠다. 만남이라는 것 자체가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연결되는 시간인데 누구 한쪽에게만 만족이 기울어진다면 그 만남은 결코 오래갈 수 없을 것 같다. 나와 상대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를 둔 채로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며 균형을 이룰 수 있다면 만남에 있어 더 바랄 게 있을까.
만남은 결국 나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