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없는 게 아니다.
사촌 동생의 결혼식이 다가오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평소 옷차림을 편하고 심플하게 입는 편이라 모처럼 격식 있는 자리에 입고 갈 옷이 없었다. 요즘 결혼식 분위기가 많이 캐주얼해지긴 했지만 그 정도도 맞출 옷이 없었다.
옷이 없는 게 아니었다. 옷은 많지만 입을 옷이 없다는 인류 최대의 난제가 문제였다. 평소에 입을 옷도 안 사는데 옷장 안에 그럴싸한 하객룩이 있을 리 없었다. 몇 년 동안 새 옷을 사지 않았기에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집착하듯 허겁지겁 소비해버린 옷들이 아직도 옷장 안에 가득하다. 잠깐의 쓸모와 함께 유행도 지났고 나도 변했다. 그땐 정말 예뻐서 산 것일 텐데 지금 그 디자인과 소재를 보면 과거의 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취향과 가치관이 변한 탓이기도 하지만 그 사이 나이가 들었다는 점도 한몫한다. 무수히 많은 짧은 옷들은 이제 차마 다가설 수 없는 존재들이 되었다.
새 옷을 사지 않는 생활 방식은 생각보다 괜찮다.
계절마다 돌려 입는 교복 같은 몇 벌만 있으면 견뎌낼 수 있다. 친환경 라이프를 지향한다는 건 이럴 때 꽤나 좋은 명분이 되어준다. 궁상이 아닌 가치관을 위한 선택이라니 얼마나 있어 보이는가. 자연스럽고 단정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제로웨이스트샵 사장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있는 것도 어딘가 좀 안 어울려 보이기도 하고.
그래도 아쉬울 때면 당근 마켓 앱을 한참 들여다본다. 놀랍게도 입지 못할 정도로 오래되고 해진 옷은 별로 없다. 반품하기 귀찮아서, 막상 사고 보니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몇 번 입다가 손이 안 가서 등의 이유로 새것 혹은 새것 같은 중고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게 나오면 살 때도 있지만 대게는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마음이 해소된다. 무언가에 혹하고 싶은 그 순간의 마음만 다스리면 금세 또 내 마음은 다른 걸 보고 있다.
이런 내가 나에게 돈 쓰는 재미와 낯선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느껴지는 신선함을 허락하는 때가 있다. 바로 빈티지 숍이다. 길 가다가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무조건 들어가 구경한다. 오래전에 생산된 재고들, 누군가 입었던 흔적이 있는 헌 옷들 앞에서는 마음껏 무장해제된다. 마음속에 꽁꽁 싸매던 취향을 펼쳐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하객룩 준비하기
아무리 허례허식이 싫다 해도 결혼식에 신경 써서 입고 가는 건 기본이다. 과시할 이유는 없지만 예의를 지킬 필요는 있다. 신부와 신랑에겐 평생에 있어 가장 화려한 날이고 양가의 일가친척들이 만나는 중요한 날이다. 잘 차려 입고 가는 것도 예의라는 엄마의 말이 내 마음에 콕 박혔다.
하객으로써 본분을 다 하기 위해 내 방식대로 하객룩을 준비하기로 했다. 일단 내 옷은 여러 벌 준비하기 번거로워 괜찮은 원피스 하나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단정하지만 너무 불편하지 않아 일상생활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원했다. 몇 날 며칠을 당근 마켓 앱만 들여다봤다. 원피스, 하객룩 등 다양한 키워드로 검색하고 가장 먼 동네로 설정해 샅샅이 뒤졌다.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마음에 드는 건 너무 비쌌다. 어떤 건 사이즈가 애매했다. 가끔 들여다보던 중고 패션 앱이 있는데 그곳엔 독특한 디자인들이 많아 마땅한 게 없었다. 역시 중고는 어쩔 수 없는 건가. 막막했다.
포기하고 무작정 초록창에 검색을 해봤다. 링크를 타고 타고 흘러가다 어느 빈티지 숍의 블로그마켓을 구경하게 되었다. 국내 여성복 브랜드의 몇 년 전 재고 상품이 많은 숍이었다. 디자인도 적당, 가격도 적당, 평소에 활용하기에 좋은 옷들도 많았다. 찬찬히 보다가 딱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다. 포장은 최소화해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바로 구매했다. 그렇게 셔츠형 카라에 허리 벨트가 있고 원단이 얇아 하늘거리는 네이비 색상의 롱 원피스를 구매했다.
아이 옷을 준비하는 과정은 조금 더 복잡했다. 당근마켓에서 괜찮은 옷을 세트로 찾았는데 거래자와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거래에 실패했다. (내가 원한 건 비대면 문고리 거래였는데 거래자가 원하지 않았다.) 반팔 셔츠와 반바지를 각각 구하려니 디자인과 사이즈가 제각각이라 선택이 어려웠다.
인스타스토리에 푸념을 올렸더니 한 인친분이 메세지를 보냈다. "혹시 사이즈가 어떻게 돼요?" 유치원에서 아나바다 행사하고 남은 셔츠가 있는데 예뻐서 가지고 있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흰색과 하늘색이 섞인 단정하고 예쁜 셔츠였는데 마침 우리 아이 사이즈였다. 잘 입어준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며 셔츠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 인친은 꽤 오랫동안 소통한 사이인데 나보다 더 제로웨이스트를 잘 실천하는 분이다. 환경에 관심 많은 엄마들은 참 이상하다. 어찌 보면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서로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만 알고 있고 SNS로 소통한 게 전부인데 어쩜 그렇게들 나누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인친에게 아이 옷을 물려받은 게 처음이 아니다. 수영복과 워터슈즈를, 운동화를, 직접 만든 면 마스크를 물려받았다. 이쯤 되면 친환경 육아는 내리사랑이 아닌지.
하나가 해결되니 나머지는 신기하게도 착착 진행되었다. 셔츠에 어울릴만한 흰색 반바지가 당근마켓에 올라와 냉큼 구매했다. 마침 사이즈가 딱인 갈색 구두는 알고 보니 같은 아파트 주민이 내놓은 거였다. 깨끗하고 예쁜 구두를 3천 원에 샀다.
아이와 함께 집에 들어가는 길에 가져오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세차게 내렸다. 급하게 우산을 펴고 옆 동으로 들어가 그 집 앞 문 앞에 가지런히 놓인 쇼핑백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지하주차장으로 가려는데 비 오는 게 좋은지 아이가 1층으로 가고 싶다고 떼를 썼다. 귀찮았지만 왠지 그 요구를 들어주고 싶었다. 한 손엔 우산, 한 손엔 아이 손을 꼭 잡고 우리 집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뭐가 좋은지 꺄르르 웃는 아이를 보며 나도 그 순간이 즐거웠다.
귀찮고 불편하다고 하자면 한이 없는 과정이다. 동네 식당에 나가서 먹는 것도 귀찮아 배달하는 세상인데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중고 물품을 구매하는 일상이 마냥 좋은 것 아니다. 그래도 나름 습관이 되고 집안 경제에도 도움이 되니 지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젠 새 물건을 사려고 하면 그게 그렇게 아깝다. 돈도 아깝지만 그 잠깐의 쓸모로 쓰레기가 되는 그 물건의 생애 주기가 너무 아깝다. 즐겁게 하고자 한다. 즐겁자 하니 못할 게 없다.
대망의 결혼식 날
아무도 몰랐다. 우리 남편과 친정 엄마 말고는. 티도 안 나는 비밀은 감추고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장착한 채 결혼식장에 갔다. 우리의 옷차림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뿌듯하고 기뻤다. 무사히 미션을 수행해냈다는 성취감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반짝거리던 결혼식은 금세 지나갔고 아이와 함께 우산 속에서 꺄르르 웃었던 기억은 내 마음속에 잔상처럼 남았다.
소중한 내 아가야.
우리 앞으로도 이렇게 웃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