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타워에서 아경까지 보고 나오니 7시가 되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 피곤한 상태라 일단 숙소 근처에 가서 밥 먹을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걸렸는데 그 사이에 주변에 갈만한 곳들을 검색했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긴자 그랜드 호텔’로 긴자 쇼핑거리 끝 신바시역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의 첫인상은 약간 명동 같았다. 화려한 쇼핑거리인데 안쪽 골목은 유흥가라 저녁이 되면 양복을 입고 호객하러 다니는 남성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낮에도 사람이 많은데 밤에는 사람이 더 많았다. 식사를 할 수 있는 밥집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일찍 문을 닫았다. 아마도 비싼 오마카세와 이자카야들이 이른 저녁부터 문을 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숙소 바로 건너편 지하에 괜찮은 식당들을 몇몇 찾았지만 이미 영업이 끝난 후였다. 신바시역 앞에 중국집이 있다는 리뷰를 보고 거기를 갈까 싶었는데 지친 아이를 데리고 걷기엔 약간 거리가 있었다. 저녁 8시가 다 되어 가는데 두어 군데 허탕 치고 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어른이야 뭐 카페에 들러 아무거나 대충 때워도 되지만 아이가 있으니 끼니를 챙길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멀리 가긴 이미 지쳤고 눈앞엔 ‘요시노야(yoshinoya)’가 보였다. 간단하게 식사하기 좋은 프랜차이즈로 관광객들보다는 직장인들이 간단히 먹고 가기 좋은 느낌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얌샘김밥이나 김밥천국 정도?
갈까 말까 고민하는데 그 옆에 라멘집이 하나 보였다. 처음엔 술집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작은 라멘집이었다. 여행 첫날 비건 라멘집을 가긴 했지만 남편이 진한 고기 육수의 라멘을 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왠지 내가 먹을만한 메뉴가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그 라멘집에 들어갔다. 키오스크에서 메뉴를 살피는데 전부 고기가 들어간 라멘뿐이었다. 해산물 라멘이나 하다못해 감자 샐러드라도 있으면 먹으려고 했는데 전혀 없었다. ‘베지터블 라멘’이 있어 직원에게 문의했더니 고기 육수에 토핑이 채소일 뿐인 메뉴였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과 아이만 먹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내가 밥만 먹겠다고 했었나? 혼란의 시간 속에서 정확한 기억 따위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무튼, 결론은 메인 메뉴인 라멘은 먹지 않고 디저트 같은 애매한 걸 선택했던 것 같은데 그걸 보더니 남편이 그냥 나가자고 했다. 내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해서 그런 것 같았다. 사실 난 거기서 안 먹어도 괜찮았다. 나의 채식으로 인해 남편이 먹고 싶은 걸 못 먹는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불편해지곤 하는데 그 순간이 딱 그런 감정이었다. 남편이 나가자고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 허우적대다 보니 어느새 식당 앞에 나와있었다. 난 정말 괜찮았다. 이미 여행에서 맛있는 식당을 많이 갔고 한 끼쯤은 대충 그렇게 때우고 편의점에서 사 먹어도 괜찮았는데..
나 때문에 라멘집을 나오고 나서부터 내 기분은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남편에게 미안했고 아이의 저녁 식사 시간이 늦어져 애가 탔다. 결국 처음에 봤던 식당인 요시노야에 들어갔다. 그 식당 역시 불고기 덮밥 전문점이라 고기 메뉴가 대부분이었는데 딱 하나 페스코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바로 장어덮밥이었다. 고민의 여지없이 빠르게 장어덮밥을 선택했다.
모든 상황이 일단락되고 나니 애타던 마음에 속상함으로 바뀌며 눈물이 났다. 남편에게 괜한 짜증을 부리고 아이 앞에서 감정 조절을 못하는 모습을 보인 것 같아 후회가 밀려왔다. 완벽한 비건도 아닌 어설픈 페스코로 내가 지금 뭐 하는 건지 싶어 현타가 왔다. 내가 고기를 먹었어야 했을까 잠시 그런 생각도 했다. 애매하게 이것도 피하고 저것도 피하려다 원하는 선택도 못하고 안 좋은 선택만 하게 되는 건 아닌지. 다시 생각해도 어떤 게 최선이었을지 모르겠다.
좋아하지도 않는 장어를 열심히 먹었다. 장어 특유의 기름진 맛이 내겐 느끼하게 느껴져 평소엔 웬만하면 장어를 먹지 않는다. 그날 저녁은 기호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식당 안 바 테이블 앞에 셋이 나란히 앉았다. 거의 주문하자마자 나온 것 같은 양념된 장어덮밥을 우걱우걱 성실하게 먹었다. 가시가 입에서 좀 거슬리긴 했지만 늦은 저녁에 배고파서인지 나쁘지 않았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힘들게 돌아다니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더니 여섯 살의 작은 내 아이는 괜찮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남편에게도 미안함을 전했다. 괜찮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차라리 내가 페스코 베지테리언이 아니라 확실한 비건이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가끔 고기를 먹는 플렉시테리언이라면 어떨까. 결론이 나지 않는 생각들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식생활은 매일 세 번씩 쉬지 않고 계속되는 쳇바퀴다. 한두 번의 경험으로 끝나는 게 아니기에 완벽하게 오차 없이 유지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건 채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이어트 식단도 마찬가지다. 한동안은 유지할 수 있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느슨해지거나 요요 현상이 온다. 극단적으로 할수록 짧게 끝나는 이유는 평생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실패하면서도 매번 도전하고 새로운 식단을 만들어낸다.
채식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선택했다. 2021년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고 비건에서 락토, 오보, 페스코 사이를 오가다 작년부터 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정착한 식생활을 하고 있다. 평소 채소와 과일 중심의 식사를 하지만 가족 식사나 타인과의 식사에서 비건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기에 할 수 있는 선에서 스트레스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중간 지점을 찾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직면하는 상황들에 매 순간 엎치락 뒷치락한다.
완벽한 정답은 알지도 찾지도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