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Swimming Paper

고뇌와 우울은 수용성

by 강민경

겨우내 눌러왔던 무기력함이 오늘은 절정이었는지 혹은 절정을 찍으려 도약하는지 절망의 기운이 느껴졌다. 수영하러 가는 길의 공상은 끊겼고, 수영복을 입기 전 물을 하염없이 맞으며 ‘혹시 물 젓는 것도 귀찮아지면 어떡하지, 수영을 하고 나서도 우울한 절망이 지속되면 어떡하지’ 걱정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기력함을 수영으로 극복해내던 참이었다. 수영만 하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 희망이 옅어지고 그 자리에 불안이 찾아온 것이다. 만약 수영을 했는데도 불안이 녹지 않고 수영하기 전 무기력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수영이 무기력의 마지노선이었는데 그마저 허물어진다면 성벽이 무너지는 것처럼 나는 쓰러지고 말 텐데. 그걸 경험했고, 그 증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어두컴컴한 영역을 혼자 힘으로 견뎌내기란 지독히도 외로운 일이라는 걸 알아서 무서웠다. 우울은 수용성이라지만 우울증은 물에 녹는 데 한계가 있는, 다른 경계의 영역이니까. 떨어지는 힘을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이며 겨우 붙잡고, 더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수영장으로 내려간다. 사람을 만나고 떠들썩거리는 강사의 잔소리를 들으면 억지로라도 반응을 해야 하니까, 그러면 그 반응을 반동삼아 힘이 나니까.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바로 자유형으로 몸을 푼다. 팔을 젓고, 다리를 차고, 일정하게 숨을 쉬며 무기력을 끌어오던 고뇌를 잠깐 잊는다. 고뇌의 힘은 참 대단하다. 무기력을 가져오는 고뇌는 그 힘이 더욱 엄청나다. 일을 할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볼 때에도 어김없이 몇 분마다 찾아와 머리를 멍하게 한다. 그런데 그 고뇌가 물속에서는 여유롭게 자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일단 몸이 살고 봐야 해서 팔을 젓고, 다리를 차고, 물 밖으로 일정하게 고개를 내밀어 숨을 쉬어야 하니까. 잠시라도 고뇌가 그것들을 방해하면 고뇌의 주인인 몸이 죽을 수 있다는 위기에 휩싸이니까. 고뇌와 우울은 수용성이 맞았다. 처음으로 들었던 이 의심이 해소되고 나면, 다음번 의심에서는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라고 위안할 수 있는 생각이 한층 쌓인다. 하루 뒤면 또다시 고뇌는 힘을 얻고 기운을 힘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수영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어서, 아주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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