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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하루일글

녹아버리는 커피

by 강민경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를 대라고 하면 수도 없이 꺼낼 수도 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를 꼽자면 내놓자마자 녹아버리는 얼음입니다. 이 더위에 뜨거운 커피는 마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얼음에 커피를 진하게 내려 녹인 후 다시 얼음을 채워 마십니다. 그런데 이 얼음이 1분도 안 돼 녹아버려서 커피가 밍밍해져 버려요. 나가서 먹는 커피야 잘 안 녹는 얼음을 넣어주고, 에어컨 빵빵한 곳에서 마시니 얼음 녹을 일이 없지만요. 집에서 커피를 마시자면 이렇게나 허무합니다. 이 더운 여름날에 나가는 일이 고되기 때문에 카페보단 덜 시원하더라도 집에 머무는 걸 택할 수밖에 없고요. 이 얼음이란 것이 냉동고 이외에서는 냉기도 내지 못하고 녹아버리고, 좋은 원두로 맛있는 커피를 내려도 1분 안에 다 마시지 않는 이상 맹맹해져 버리죠. 그뿐인가요. 컵에는 이슬이 맺히다 못해 바닥에 물 한 바가지를 쏟아냅니다.


진한 색이던 커피가 얼음이 녹아 희석되며 맑은 갈색으로 변하는 걸 보면 기분이 처져버려요. 왜인지 저도 녹아서 맹맹해져 버리는 기분이 들거든요. 힘도 못 쓰고 녹아버리는 일이 왠지 존재감을 잃은 내 기분과 닮아있어서, 그걸 눈으로 발견하는 것이 좋지 않은 기분으로 점쳐진 나를 발견해 버린 것만 같아 찝찝해서. 그럼에도 꿋꿋이 커피원두를 갈고 얼음을 잔뜩 담아둔 컵에 커피를 내립니다. 여름이 고점을 찍고 흐릿해지면 얼음이 녹는 시간은 길어질 거고 그러면 커피가 맛있는 시간은 조금씩 길어질 게 분명하니까요. 어쩌면 여름이 싫은 이유는 여름이 언젠간 사라질 시간이기 때문이겠죠. 사라지지 않는 계절이라면 얼음이 녹고-커피가 맛이 없어지는 이 순간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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