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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pty Sep 17. 2022

소주가 없을 땐 와인을

오늘은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 사이에서 은근한 무시를 당하고 은근하게 없는 사람을 취급하는 공간에서 9시간이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눈치 보이는 일이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끔 주입시킨 사람은 사실 없다지만 조용한 사무실에 앞만 보고 일을 하려니 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부담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사무실의 구조는 꽤나 넓은데 중간에 메인 직사각형으로 넓은 공용 책상이 길게 늘어져있고 그 끝 반대편에 내가 있다. 이렇게 말로 설명하면 당장 그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만 이해하겠지만 그냥 나는 벽을 쳐다보고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창문이 뚫려있고 창문 밖엔 소나무인지 대나무인지 모를 풀들이 무성히 자라나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치는 날이면 그것들이 너무나도 세차게 흔들린다.


나는 평소에 그런 것들만 바라보고 일을 했어야만 했다. 마치 이 사무실에서 나와 함께하는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루는 세차게 흔들리는 그것들을 보고 쟤들은 저렇게 흔들리고 싶어서 흔들리는 걸까, 바람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고 싶은 마음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정말 바보 같지만 그런 자리에서 노트북을 하다가 고개를 들면 그것밖에 보이질 않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기력이 쪽 빠진 하루였다 보니 집에 오자마자 밥을 먹고 나도 모르게 벽에 기대서 이불을 꽉 끌어안고 유튜브를 보다가 너무 힘들어서 밥을 먹은 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이불을 끌어안고 자버렸다.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아서 눈을 떠보니 새벽 2시 30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다행이었다. 새벽 3시 전까지 매일 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눈을 대충 비비적거리고 마스크를 들고 공원으로 나가서 20분을 걷고 왔다.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잘 수도 있었겠지만 프로젝트를 하루라도 안 하면 만원에서 만 오천 원이라는 돈을 허공에 날리는 것과 같아서 내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상황이고 그렇게라도 돈을 벌어야만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실제로 하루에 만 원 혹은 그 이상 벌리는 프로젝트는 못 봤다.


투자금이 많다면 모를까 나는 이때까지 한 50만 원 정도의 돈을 나누어서 투자한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하루에 이렇게 벌리는 것도 참 감사한 일이다. 길 가다가 하루에 만 원이란 돈을 물론 줏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날들이 많기 때문에 나는 비가 와도 태풍이 와도 프로젝트를 하러 집 밖을 나서야 한다.


그렇게 20분을 다녀와서 집에서 본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먹으려고 빈 손으로 들어왔다. 들어와서 맥주를 확인해보니 페트병에 들어있는 맥주는 정말 별로 없었다. 이럴 거면 소주라도 두어 병 사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에 잠깐 후회를 했지만 아주 조금 남아있는 맥주를 먹자니 차라리 안 먹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찰나의 고민을 하다가 그 아래 보이는 와인은 꽤나 먹을 양이 많아서 와인을 가지고 방에 들어왔다.


한 잔, 두 잔 먹으며 드는 생각은 나는 와인이랑 정말 안 맞는구나, 난 오롯이 소주파구나 생각이 들었다. 싸구려 입맛인지 아니면 정말 한국인의 피를 진하게 가지고 있는 탓인지 소주 말고 다른 술은 별 감흥이 없다. 이제 토요일이 된 오전 4시니까 이제 슬슬 잘 준비를 하고 일어나서 허투루 쓰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빈다. 내가 뭐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 하루에 돈을 버는 것 말고 그리고 글을 쓰는 것 말고 다른 것도 더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할 수 있는 게 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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