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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pty Mar 08. 2023

30대의 구직과 그간의 결과물들

나는 서른두 살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살아있을 줄 몰랐다. 단순히 그리고 적당한 삶을 살다 죽을 줄 알았다. 내 손으로든 남의 손으로든. 하지만 정말 비참하게도 그건 나의 가장 간절하고도 희망적인 회피처였고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죽음이라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자 희망이었다. 나 같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로서는 그런 큰 축복을 바랄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구원해 줄 마지막 희망이자 마지막 동아줄이랄까.


30대가 된 이후로 취업을 해본 적은 두 번, 세 번 정도 있는 것 같다. 재작년 9월 즈음 유명한 패션회사의 리셉션 포지션으로 3개월간 근무를 하고 계약을 연장하지 못해서 그대로 퇴사를 하게 되었고 그 이후 바로 좋은 기회로 입사를 하게 되어 또 3-4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근무를 하게 됐다. 두 번째 근무지는 어찌어찌 잘 버텨오다가 코로나에 걸린 뒤 14일 후 직장에 복귀했지만 반기는 사람 하나 없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무시했다. 심지어 아르바이트생들까지도 나를 멀리했다. 알고 보니 코로나에 걸린 뒤 문자나 전화, 카톡으로 코로나에 걸려서 죄송합니다. 피해를 끼쳐 죄송합니다라는 식의 사과 연락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모든 직원들이 나를 등한시했다고 한다. 복귀하자마자 본사 직원이 와서 나와 단 둘이 이야기를 했는데 하는 말이 "00 씨 코로나 걸려서 죄송하다고 연락 돌렸어요? 아니 연락이라도 했어요?"라는 말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내가 연락 안 한 것이 아주 큰 잘못인 줄만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코로나 걸린 당사자가 죄송하다는 연락을 할 새가 있었을까? 나는 정말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했는데 참 너무한다라고만 생각했다. 어차피 그곳의 업무는 리테일이었어서 나와는 정말 맞지 않았다. 아무리 개같이 일해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업무와 포지션이었다.


그렇게 코로나 걸린 직장을 뒤로하고 모든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그만두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퇴사를 했다. 그때는 독립해서 신림동에 살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부담스러웠다. 그때 당시 살던 집도 얼른 빼줘야 하는데 2주 만에 새로운 집을 알아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나 서울에서 나고 평생 자란 나로서는 월세가 조금 비싸더라도 화이트톤의 깔끔한 인테리어를 바랐지만 그런 곳은 정말 많지 않았다. 그때 당시 살았던 원룸은 2019년 신축에 4평은 넘을까 싶을 정도의 좁은 원룸이었고 해가 들지 않는 곳이었다. 해가 뜨는 쪽으로는 창문이 나질 않았고 창문이 나있는 곳은 옆 건물이 바로 붙어있어서 해가 절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하루종일 잠만 잘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의 원룸이었다. 그리고 방 쪼개기를 했는지 옆방의 유튜브, 티비소리도 모두 들려와서 너무나도 스트레스가 있었고 경찰까지 왔었던 적이 있어서 그랬는지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따위 집이 월세 53만 원이었다. 수도, 전기는 별도였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내 집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서러웠고 슬펐다. 이럴 거면 왜 이 나이 때까지 살아있는 걸까 싶기도 했다.


그 이후로 1년을 어찌어찌 버텨서 퇴사를 하고 난 뒤의 상황은 지금이다. 나는 지금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30대의 구직은 정말 어렵구나.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도 더 힘들고 고되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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