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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앞에 놓인 막걸리와 종이컵

씁쓸했다

by empty

내가 지금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은 어려서부터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어려서는 술이 무슨 맛인지도 몰랐거니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술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는 셀카도 많이 찍고 꾸미기도 잘 꾸미고 다녔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타락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인생은 거의 반 포기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다.


아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미 무수히 많은 글을 썼지만 접대가 됐건 아빠가 친구들이랑 마시는 술이 됐건 일단 아빠는 너무 많은 술을 드시고 계셨고 가장 중요했던 것은 병원을 절대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이야기를 듣기로는 아빠는 병원 같은 쓸데없는 곳을 왜 돈 주면서 다니냐고 이야기를 했더란다. 뭐 물론 아빠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긴 하다. 그래서 아빠는 간 검사나 건강검진 등을 살면서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나도 이제 30대 중반이고 엄마나 아빠처럼 최소한 두 배는 더 살아가야 할 텐데 이렇게 하루살이처럼 살아도 되나 싶을 때가 종종 든다. 엄마에게 몇 살까지 살아야 미련 없이 오래 살지 않는 삶이겠냐고 물었더니 최소 90살부터가 오래 산다는 거 아니겠냐는 말을 듣고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가족들과 마주하기 싫다고 뛰쳐나온 집에서 새로운 곳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문득 발견한 편의점 앞에 있는 막걸리 한 병과 종이컵 한 개가 내 발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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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이유에서 이 추운 날 막걸리에 안주도 하나 없이 먹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마음이 미어졌다. 저 아무렇지도 않은 막걸리와 종이컵을 보고 사람들은 쓰레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 굳이 이렇게 추운 날에 저렇게 저기서 급하게 먹었어야 했을까, 막걸리를 한두 잔만 마시고 도망치듯 떠난 느낌도 들었고 막걸리 병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걸 봐서는 급하게 자리를 떠야 하는 상황이었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나는 남들보다 공감을 매우 잘하고 순간 몰입을 잘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런 모습들을 보면 나에게는 꽤 굉장한 보물을 획득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이 상황을 이렇게 만들고 간 사람은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동네에서 추운 날 저렇게까지 했다는 것은 나처럼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다거나 뭐 그런 걸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내가 예상하고 짐작하는 것들이 다 정답이 아닐 수 있지만 이 동네가 낡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종이컵이 두 개도 아니고 한 개밖에 없다는 뜻은, 게다가 안주삼을 과자조차 없다는 것은 더욱더 마음이 가는 장면이었다.


공감 능력이 너무 좋아서 좋을 수도 있지만 나 자신도 너무 몰입되어서 오히려 더욱 뇌 돌아가는 속도가 남들보다 훨씬 빠르고 그만큼 에너지 소비도 상당하다. 나는 나 자신도 돌볼 줄 모르고 술만 퍼마시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두고 간 막걸리 한 통과 종이컵 하나에 그렇게 마음을 쓰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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