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은 아니지만 요즘 정말 점점 몸이 심각해지는 걸 몸소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부랴부랴 일찍 일어난 것도 아니지만 다른 날에 비하면 빠르게 일어나긴 했다. 물론 아침에 정신 차리느라 정말 힘들었지만.
일단 서울에도 좋은 병원들이 있었지만 굳이 집과 정 반대에 있는 곳으로 간 이유는 알코올 전문 치료 병원이라고 했고 보건복지부에서 지정한 병원이라고 해서 믿음이 더 갔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서울에도 그런 곳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걸 잘 못 찾아봐서 대충 신뢰가 가고 괜찮은 병원이라고 생각해서 한번 가보려고 마음을 먹긴 했었는데 처음 병원을 알아볼 때 미리 전화해서 처음 방문하는데 몇 시까지 방문해야 상담을 받을 수 있냐고 문의를 했더니 초진의 경우 오후 3시 전까지는 무조건 접수를 해야 하고 예약자가 있을 시에는 대기시간이 더 길어질 수 있다고 했다.
카카오맵으로 병원까지 가는 방법을 검색해 보니 1. 지하철 타러 가는 시간 2. 지하철 타는 시간 3. 지하철에서 내려서 버스 타고 가야 하는 시간 4. 내려서 걸어가야 하는 시간까지 계산을 하면 2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혼자 살 때 있었던 곳에서 갔으면 그리 멀지는 않았을 텐데 굳이 반대쪽에서부터 출발하려니 정말 까마득했다. 출발하려고 마음먹기도 쉽지 않았다. 이동시간만 2시간에 3시 전까지 무조건 방문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난 열두 시 반에는 집에서 나와야 여유롭게 갈 수 있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밥을 먹고 부랴부랴 씻고 나갈 준비를 마치고 나니까 오후 1시 30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니 1시 50분가량 됐을까?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해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혹시 초진인데 몇 시까지 가면 상담받을 수 있을까요?" 전화를 받은 간호사님은 4시 전까지만 오시면 되는데 예약이~ 잠시만요-라고 하시더니 예약표를 보시고 예약자들이 있어서 3-40분 정도는 기다릴 수 있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전화하길 잘했다 싶었다. 그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무조건 3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어서 다른 날 다시 도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 병원을 가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요즘 집에서 어딘가를 나가기 위한 행동들이 너무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수염을 밀고 몸에 물기를 닦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고르고 가방들을 챙기고 하는 행위들이 점점 하나씩 벅차다는 감정과 섞여가는 느낌이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정말 친절한 원무과 선생님에게 안내를 받고 앞에 있는 예약들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처음이다 보니 설문조사지와 간단한 기저질환 등을 적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이름이 호명되고 선생님을 마주했다.
내 느낌으로는 3-40분 정도 상담 아닌 상담을 한 것 같은데 의외로 디테일하게 물어보시기도 하고 술에 관해서 이런저런 질문들을 해주셨다. 술을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했는지, 술을 마시기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요즘 힘들거나 술 때문에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는지 내 생각보다도 더 디테일하게 물어봐주셔서 한 편으로는 세심하게 봐주시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었고 한 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그 병원의 원장이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을 보셨을 것이고 입원, 퇴원을 하는 과정에서도 밀접해있기 때문에 환자의 아픔을 이해해 주려는 느낌이 들었다. 일반적인 정신과 상담보다 마음이 편했고 특히나 내 마음이 고슴도치처럼 뾰족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장 선생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해주셨고 더 하고 싶은 이야기 있는지 계속해서 물어보셨다. 원장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 중에는 내 의지가 아니라 뇌에서 문제가 생긴 거라 알코올 중독은 병이라고 했다. 그 말이 왜 그렇게 다행스럽게 들렸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게 술만 마셔대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뇌 쪽에 문제가 생겨서 그렇게 하는 거라고 말은 해주셨는데 사실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 건지 사실 잘 모른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셨는데 알레르기와 알코올 중독이 가장 비슷한 사례라고 했다. 봄이 되면 꽃가루가 휘날리니까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냐? 마스크를 쓰거나 꽃가루가 흩날리지 않는 곳으로 가서 살면 된다. 그거랑 비슷하게 알코올 중독도 비슷하게 설명은 해주셨다. 술이 없고 술이 생각나지 않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뭐 그런 말이었는데 워낙 긴장하면서 들었던지라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일주일 치 약을 받아왔다. 뇌에서 조금 억제시켜 주는 약도 있고 술 때문에 기억력이 저하되는 부분에서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약 등등 이것저것 해서 아침 점심 저녁 약 개수가 다 다르다. 보통 4알에서 많게는 6알까지 있고 거기다 추가로 먹어야 하는 약까지 있으니 밥 먹는 것보다 약을 먹는 게 더 배부를지도 모르겠다.
아, 그리고 밥 먹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하루 세 번 삼시 세끼 꼬박꼬박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을 해주셨다. 거기다 화를 내지 말고 외로워하지 말고 피곤해하지 말아라....라는 말들까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거 제가 다 해당되는데요...." 했더니 알코올 중독인 사람들은 다 그렇다더라. 뭐 약은 먹어봐야 알겠지만 술을 완벽히 끊고 행복한 삶! 술이 없는 인생 2막! 을 바라는 건 절대 아니다. 그냥 내 의지로 기분 좋을 때 먹고 기분 좋지 않을 때 먹지 않는 수준까지 올라오는 게 목표다. 난 어려서부터 정신과 약을 많이 먹었는데 호전된다는 느낌을 전혀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처방전에 대한 불신만 가득한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믿고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게 먹어야만 내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