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부(中部) ³시즈오카
나가노에서 시즈오카로 가는 길에는 도쿄를 거친다. 출근길에 사람 가득한 도쿄역에서 정신없이 신칸센을 갈아타러 가며 생각한 것이 있다. 혹시라도 내게 이런 기차여행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절대로 도쿄를 경유하지 말 것. 전쟁터를 방불케 하던 도쿄역에서 다시금 그 생각을 곱씹으며 드디어 남쪽으로 향한다.
도쿄에서 시즈오카로 가기 위한 히카리 505호. 이미 탑승 중인 승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자리를 찾고 재빠르게 캐리어는 발아래로 끼워 넣고. 여러 번 탔다고 이제 제법 초보 기차여행객 티를 벗은 것도 같지.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넓었다. 역사 안은 상점도 무척 많았고 기념품샵도 꽤 크게 잘 되어있었다. 츄부지방은 도쿄 근교라 여행객이 많아 그런 걸까.
겨울에 피는 벚꽃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시즈오카에서 봤던 벚꽃도 그런 겨울의 벚꽃이었을까. 신기해서 사진을 찍던 내 옆으로 슬그머니 등장한 어떤 외국인도, 같은 벚꽃나무의 사진을 잔뜩 찍어갔다. 겨울에도 제법 포근한 날씨를 유지하는 시즈오카 덕에 진귀한 광경을 다 보고. 운이 좋았다.
시즈오카역에서 도보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슨푸성공원(駿府城公園). 슨푸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살던 성. 화재로 천수각은 소실되었으나 망루나 성벽 등이 잘 보존된 상태로 내 외곽을 공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관광객도 많지만 현지인들이 쉬거나 어린이들이 소풍을 나오거나 하는 한적하고 널찍한 공원이었다.
점심 전 가볍게 하려던 산책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공원이 이렇게까지 넓을 거라는 기대를 안 했기 때문. 슨푸성공원은 시즈오카역에서 도보로 15분 남짓으로 거리가 무척 가깝다. 삿포로에서 나카지마 공원을 만난 경험이 있으면서 어찌 그걸 까맣게 잊은 채, 도심에 있는 공원이 커봤자 뭐 얼마나 크겠냐는 안일한 생각을 한 건지.
외곽을 따라 반바퀴를 빙 돌고 공원 안으로 들어가 그 안을 또 한참 걸었다. 구름이 잔뜩 낀 축축하고 흐릿한 하늘 아래에서 지금까지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두런두런 나누면서.
파랗고 맑은 날이었다면 이런 느긋한 온도와 속도의 산책은 없었겠지. 채도 낮은 날씨 덕에 거니는 내내 차분하고 잔잔한 마음을 안은 채였다.
한동안 츠케멘을 못 먹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잘 참았다. 애초에 참을 계획이었다. 시즈오카에 가면 츠케멘을 먹을 수 있다는, 맛있는 계획을 품고 있었으니.
시즈오카의 맛있는 계획. 라멘 야부키는 시즈오카에 세 점포가 있고, 그중 본점에 왔다. 라멘 가게의 좌석이 다양한 것이 또 신기하고.
차슈 교카이 쇼유(チャーシュー魚介<醤油>) 라멘. 그리고 화려하게 등장하는 우리의 주인공. 우마카라츠케멘(うま辛つけ麺). 원래 츠케멘을 좋아하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매우 맛있는 맛. 시즈오카의 첫 식사를 너무 만족스럽게 열었다. 이때 이미 알았던 거다. 시즈오카가 무척 마음에 들 것이라는 것을.
시즈오카 상점가에서는 이른 성탄절의 냄새가 났다. 붐비지 않는 사람들. 한산한 거리. 흐릿하게 가라앉은 날씨 탓인지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차분했다.
산마루쿠카페는 크루아상이지. 초코 크루아상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인점인 카페로 스타벅스를 찾곤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스타벅스보다 좋아하는 산마루쿠카페. 쵸코쿠로(チョコクロ)라는 초코 크루아상이 대표 인기 메뉴. 물론 대표답게 아주 맛있다. 커피 냄새보다 빵 굽는 냄새가 더 진하게 나는 산마루쿠카페.
아직 일본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을 때에는 히라가나를 알고 카타카나를 알아도 간판의 글자가 재빠르게 읽히지 않았더랬다. 그래서 반년 넘게 이 카페의 이름이 '산마루'라고 생각했다. 일본어인데 산마루 카페래 너무 귀엽다. 라며 지나다닐 때마다 괜히 동그란 산등성이를 생각하던 과거. 이름만 봐도 절로 동글동글 초록 동산이 생각난다. 아마 나만 가지고 있을 상상이겠지.
라이브로 피아노 연주를 하는 매장이라니. 시간대별로 30분씩 텀을 두고 연주가 있는 것 같다. 피아니스트도 매일 같은 사람이 아니라서 선곡도 다양하다고 한다. 편하게 커피 마시고 빵 먹고 대화하면서 생라이브로 피아노 소리를 듣는 게 이게 행복이 아니고 뭐람. 시즈오카에서는 신기한데 기분 좋은 선물을 많이 받는 기분이 든다.
숙소에 체크인할 때 카운터에서 받은 에키미나미긴자(駅南銀座) 쇼핑 쿠폰. 시즈오카역 기준으로 남쪽에 있는 상점가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이었다. 아마 백화점이나 상점가가 있어 번화한 북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덜 몰리는 남쪽의 활성화를 위한 캠페인이 아닌가 싶다. 쿠폰을 꼭 사용하지 않더라도 어떤 가게가 있는지 전단지와 구글을 통해 열심히 찾았다. 오늘 저녁은 에키미나미긴자다.
쿠폰을 사용할 수 있는 상점가 중에 마음에 들었던 곳은 두 곳 중 우리가 들어온 곳은 분위기가 밝은 이자카야 미젠(みぜん)이었다. 사실 맞은 편의 오뎅바에 가고 싶었는데. 너무나도 진입장벽이 높은 한자 겁쟁이들. 하지만 이곳도 메뉴판에는 사진 없이 전부 한자였다. 이래서 동네 이자카야가 무섭다니까.
이자카야 주문은 늘 어렵다. 요즘은 터치패드로 주문하는 곳이 늘어서 한국어나 영어를 지원해 주는 곳이 많지만, 보통 동네 작은 이자카야의 메뉴판은 사진 하나 없는 한자로만 된 곳이 많기 때문. 심지어 손글씨 실력 뽐내느라 날아다니는 흘림체로라도 쓰여있는 날에는 정말 막막하다. 미젠의 메뉴가 그랬다. 오늘의 메뉴는 전부 손글씨라 뭔 말인지도 모르겠고. 제법 난감하지만 그래도 이 역경을 헤쳐나가겠다는 외국인 1, 2인 짝꿍과 나는 제법 진중한 얼굴이었을 거다. 고작 생선 먹을래? 튀긴 거? 회? 조린 거? 이러고 있었을 테지만.
컵을 씻고 있던 여자 직원이 흘긋흘긋 우리 테이블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빨리 주문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면 긴장해서 또 쓸데없는 것을 주문하고 말 거야. 침착하게. 침착하게. 그때 그 직원이 우리 테이블로 주문을 받으러 오고야 말았다. 어버버 2초. 스미마셍 터지기 1초 전. 직원분께서 먼저 혹시 한국분이시냐며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순간, 이런 곳에서 한국인을 만난다고? 하는 생각이 잠깐. 얼른 정신 차리고 네 여행 왔어요 대답하며 이어가는 대화가 시즈오카의 놀라운 선물 완결 편이 될 줄은 몰랐지.
사진으로 남긴 수많은 요리는 그 선물처럼 나타난 직원분의 추천과 설명으로 차려진 야무지고 맛있는 한 상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호감이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이제는 너무 잘 안다. 한국이 좋아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한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직원은 다음 달에 처음으로 한국행 여행을 결정했다고 했다. 몇 달 전부터 예약을 다 해놔서 벌써 두근거린다며 웃던 얼굴. 우리가 이 기차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하는 날이 본인의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말을 듣게 된 우리.
여행의 힘은 대단하다. 외국만 나가면 어디선가 몸속에서 피어나는 애국자의 힘찬 기운은 안 하던 짓도 하게 한다. 생전 그런 생각도 시도도 안 하는데 결국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날 한국에서 만날까요? 뛸 듯이 기뻐하는 앳된 얼굴은 소녀 그 자체였다.
짝꿍과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즈음 테이블로 찾아온 우리의 새 친구. 본인이 주는 서비스라며 건네주고 간 녹차와리(緑茶割り) 두 잔. 큰 선물이 주고 간 깜짝 선물이다. 일본에서 일할 때 가게에서 드링크 메뉴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는 짝꿍은 바로 알아봤고, 그런 경험이 없던 나는 실제로 보는 것도 처음이었던 녹차와리. 녹차의 고장 시즈오카에서 마시는 생애 첫 녹차와리라니. 정말 즐거운 저녁이 아닐 수 없다.
답지 않은 용기가 만들어낸 놀라운 선물을 안은 시즈오카의 밤은 웃음이 가득이었다.
이튿날 아침. 하루로는 아쉬웠던 시즈오카를 조금 더 즐겨보기로 했다. 보통은 아침 일찍부터 기차를 타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 했는데 이번엔 이동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나왔다. 숙소는 일찌감치 체크아웃. 짐은 맡길 수 있다고 하기에 짐만 맡겨두고 전철을 타러 역으로 간다. 떠나려는 날에 이렇게 맑으니 괜히 섭섭.
시즈오카역에서 전철로 세 정거장인 시미즈역. 굳이 아침 시간 쪼개서 시미즈까지 온 이유는, 이곳에 있는 어시장에 가기 위해서.
마구로를 원 없이 먹어보겠다고 일부러 찾아온 곳이지만, 원래 가려던 식당에는 못 가고 다른 곳으로 노선을 틀었다. 가게 밖에 마구로 잔뜩 올려진 사진이 있는 걸 보고 들어간 반노우수산(バンノウ水産). 시미즈항도 보이고 가게도 깔끔하고 좋았다. 어중간한 시간이라 사람이 없었는데 먹고 있으니 일본인 노부부가 들어와서 맛있는 곳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아싸!
원래 먹으려던 깍둑 마구로동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좋았던 시즈오카에서의 마지막 만찬. 원 없이 마구로를 먹고 나니 정말 시즈오카 일정이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아쉬웠다. 그래도 이 아쉬움은 늘 그렇듯 언젠가 다시 와야지 하는 다짐으로 충전해서 나아가면 된다.
시미즈역에서 멀리 보이는 후지산을 보니 또다시 생각나는 산마루(쿠) 카페. 동그란 하얀 머리의 후지산을 볼 수 있게 날씨가 맑아서 다행이었다. 안녕, 우리는 갈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던 시즈오카는 하루의 일정인 것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언젠가는 꼭 다시. 좋았던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기회가 좋은 인연이 되었던. 감사한 선물을 안겨준 시즈오카에, 언젠가 꼭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