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부(中部) ²카루이자와
카루이자와(軽井沢)는 일본인들에게도 휴양지라는 인식이 강한 곳이다. 휴양지라 하면 관광지와는 또 느낌이 다르지 않은가. 더불어 굉장한 부촌. 일본의 상류층들이 별장을 두고 쉬러 오는 곳. 매체에서 다루는 카루이자와도, 내가 생각하던 카루이자와도 딱 그런 곳이었다. 조용하고 부산스럽지 않고 아마도 외국인보다는 자국민이 많은 곳. 그렇게 카루이자와에 도착해 시야에 가득 찬 풍경은 내 머릿속에 그렸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츄부지방은 여행 전에도 왠지 마음에 들 것 같다고 생각했던 곳이라 다른 지방보다 나도 모르는 기대감이 조금 더 높았던 것 같은데도 발이 닿는 곳마다 그렇게 기대 이상일 수가 없었다. 청명한 초겨울의 맑음은 또 이렇게나 선물이고.
적당히 차가운 공기를 삼키며 깨끗하고 조용한 주택가를 걷는 발이 제법 들떠있었던 것도 같다. 와, 내가 카루이자와에 와있네.
카루이자와에 온 목적은 두 가지. 공교롭게도 그 두 가지가 역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나뉜다. 카루이자와역 북쪽 출구로 나와 방금 걸어온 조용한 주택가를 따라 산책하듯 슬슬 걷다 보면 도착하는 구 카루이자와 긴자쇼우텐가이(旧軽井沢銀座商店街)가 첫 번째 목적. 산책하듯이라고 한 것은 역에서 상점가까지 도보로는 25분~30분 정도 걸리기 때문. 보통은 버스를 타거나 자차를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 같지만 오늘의 나는 기분 좋은 뚜벅이니까.
상점가까지 걸어오는 곳곳에는 멋진 가게나 숙박이 가능한 곳이 많았다. 카루이자와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은 전부터 그리던 일이라, 나도 언젠가는 그럴 수 있겠지. 오늘은 사전답사지 뭐! 라며 씩씩하게 여행객의 발걸음으로 도착한 상점가는 이제 막 오픈한 터라 아직 사람도 적고 가게도 한산해서 둘러보기 좋았다. 이른 아침을 선택하길 잘했지.
상점가 입구부터 미피랑 스누피의 심장폭격이 시작됐다. 나도 모르게 귀여워 귀여워를 연발하게 하는 가게들. 미피샵에 들어갔다가는 정신 못 차리고 손에 잔뜩 쥐고 나올 것 같아 자제하고 스누피샵만 살짝 구경했다. 스누피 빌리지는 2층에 스누피 차야(SNOOPY茶屋)라는 카페가 있었다. 귀여운 메뉴들이 많겠지. 절대 들어가서는 안 돼. 이런 상점가 기념품샵은 늘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자제해라, 어른아.
카루이자와의 명물 버스라는 카루이자와아카버스(軽井沢赤バス)를 봤다. 카루이자와의 이 빨간 버스는 순환 관광버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상점가를 경유해서 숲을 지나 공원 전망대까지 달린다고 한다. 계절 한정이라 보통 4월 말에서 11월 말까지 운행하는데 마침 방문했을 때가 11월 중순이라 운 좋게 봤다. 요금은 성인 기준 1회에 500 엔. 전망대 쪽 풍경이 무척 멋지고 산책로도 있다고 해서 언젠가는 꼭 타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
피터 래빗을 보면 항상 생각나는 곳이 있다. 도쿄 지유가오카의 RAKERU. 피터 래빗 카페로 유명한데 나는 라케루라는 오므라이스 가게로 기억하고 있다. 들어가면 아기자기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동화 속에서 나온 것 같은 옷차림의 점원. 그리고 곳곳에 앉아있는 커다란 피터 래빗 인형이 무척 귀여웠더랬다.
상점가에 있던 피터 래빗 숍을 보니 괜히 같이 밥을 먹었던 피터 래빗 인형이 생각났다. 이렇게 여행 중 스치는 것에서도 기억 속 기억을 꺼낼 수 있다. 그런 작은 기억들이 전부 다 내게는 커다란 추억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여행이다. 역시 여행이나 삶이나 다를 게 없다. 딱히 계획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즉흥 속에서조차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이 또 여행의 묘미고 삶의 재미겠거니.
뭐 이래저래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원래 가려고 했던 가게가 아닌 다른 가게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갔어야 했던 가게는 스쥬마사유키(酢重正之)라는 일본 가정식 가게였다. 카루이자와에서의 식사는 어디서 할까 짝꿍의 멋진 구글링으로 건진 곳. 걸어 걸어 찾아갔더니 저렇게 사람들이 줄을 잔뜩 서있길래 얼마나 맛있으면 오픈도 전부터 이렇게 줄을 서있을까 기대 반 쭈뼛 반으로 그 사람들 틈에서 함께 기다렸더랬다.
가게가 오픈하자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 들어섰다. 밥집이 좀 특이하게 생겼네. 일하는 사람 엄청 많네. 그때까지도 뭐가 잘못된 지 인지도 못 하고 있다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받아 들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지. 이곳은 우리가 가려던 곳이 아니다. 밥집이 아니다. 소바를 파는 곳. 카와카미안(川上庵)이라는 카루이자와에서 무척 유명한 소바 가게였다. 무려 본점. 메뉴판에는 사진 하나 없이 일본어만 잔뜩이었고, 밥을 생각하고 들어갔던 우리는 이 배고픔을 어떻게 소바로 달래냐며 망연자실. 둘이서 어떡할까? 그냥 나갈까? 를 몇 번이고 말했으나 결국 어버버 주문했다.
계절 야채의 아게다시와, 쿠루미로 만든 소스에 찍어먹는 소바를 시켰나 보다. 뭘 시켰는지도 모르고 이게 무슨 맛인지 내가 뭘 먹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당황함에 기억에 남아있을 틈도 없었더랬다. 카와카미안이 굉장히 유명해서 각지에서 방문할 정도라는 것도 후에야 알았는 걸. 우리는 최대한 빨리 식사를 완료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바로 옆에. 정말 바아로 옆에 있었다. 우리가 가려던 스쥬마사유키가... 그곳에서 기다리는 줄 없이 여유롭게 식사하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터덜터덜 발을 돌렸던, 지금은 웃지만 당시엔 당황스러웠던 기억.
카루이자와역 북쪽 출구로 나와 걸으면 긴자 상점가. 남쪽 출구로 나오면 바로 커다란 아웃렛이 있다. 그 아웃렛에 도착해서 잠시 둘러보다가 배를 채우러 들어갔던 곳인 소스카츠동으로 유명한 메이지테이(明治亭). 여기도 시간이 어중간해서 다른 곳에 들어갈 곳이 있나 둘러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들어갔던 곳이었는데 후에 알았다. 메이지테이는 방송에도 나올 정도로 나가노에서 무척 유명한 소스카츠동 가개라는 것을. 이렇게 또 즉흥 속에서 건진 행운.
나가노를 일컫는 신슈(信州). 그 신슈의 명물이라고 불리는 바사시. 나가노 자체가 말고기로 먹는 사시미가 유명하다고 한다. 나는 원래 카츠동을 즐겨 먹지 않으니 짝꿍이 반 강제로 주문한 바사시동(馬刺し丼). 밥과 날고기를 먹는 것도 즐기지 않으므로 사시미를 건져 먹으며 신기하다 소리만 하고 있었다.
그때 도착한 로스 소스카츠동(ロース ソースかつ丼). 나는 돈까스도 밥이랑 잘 먹지 않고 짝꿍은 돈까스를 좋아하긴 하지만 카츠동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둘 다 그냥 배가 고파서 들어왔던 것이라 아무런 기대도 않았던 소스카츠는 심지어 소스에 담긴 채로 나오니 더욱더 별 기대를 않았다.
기대를 안 해서일까? 아니다. 기대를 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다. 우리는 무지했다. 소스카츠동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었다. 소스에 푹 담겨서 나왔음에도 바삭하고 바삭한데 부드럽고. 소스카츠라는 명성에 걸맞게 아주아주 맛있는 소스가 튀김에 스민 맛. 두 번 먹고 세 번 먹어도 맛있을 맛이다. 우리는 정말 무지했다. 식(食)견이 아직도 한참 모자라다. 소스카츠 먹으러 나가노에 간다? 오케이다. 당연하다. 그래도 된다. 그 정도로 맛있게 배를 채우고 나왔다. 이렇게나 성공적인 식사를 아웃렛에서 할 수 있었다니. 정말 백 점이고 이백 점이고 줘야 해.
짐을 늘리면 안 되는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쇼핑을 목적으로 방문한 곳인 카루이자와 프린스 쇼핑플라자(軽井沢プリンスショッピングプラザ)가 카루이자와에서의 두 번째 목적이었다. 규모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확 트인 곳일 줄은 몰랐다. 점포도 많고 브랜드 종류도 많지만 그것을 차치하고라도 다시 방문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이 전경이 가장 큰 이유다. 넓은 공간. 큰 호수. 잘 되어있는 산책로. 사람이 많아도 붐벼서 불쾌하거나 인상 찌푸릴 일이 없었다. 날 좋은 날 공기 좋은 큰 공원에 산책 나온 기분.
카루이자와의 가을을 아웃렛 주차장 쪽에서 만났다. 입구 쪽에 즐비한 나무들의 단풍이 예뻐서 한참 구경했다. 어느 정도로 예뻤냐면, 나 말고도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아서 한동안 기다렸다가 후딱 몇 장 찍었을 정도로 알록달록 예뻤다.
11월의 카루이자와는 아직 가을을 다 벗지 못한 겨울의 입구였다.
일본에서 살 때도 그랬고 종종 여행으로 갈 때에도 항상 생각했던 것. 이 나라는 12월의 전구들을 위해 나머지 11개월을 힘내서 사는 건가. 그 정도로 연말의 루미나리에에 진심인 나라다. 관광지나 역, 공원들은 물론이고 작은 가게나 조형물에도 여기저기 반짝이는 전구투성이다.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겨울의 일본은 해가 지고 난 후부터가 화려하고 예쁘다고 생각한다. 어딜 가도 반짝이고 있으니까.
프린스 쇼핑플라자도 저녁이 되니 나무들이 반짝이거나 그 아래에 불을 품거나 했다. 밝을 땐 청명하고 파래서 눈이 즐겁더니, 어두워지니 곳곳의 반짝임에 눈이 즐거웠다. 역시 카루이자와의 겨울을 벌써 만난 것만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 채워서 카루이자와에 있었지만, 조금 더 있고 싶었다는 아쉬움을 안은 채로 나가노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딱히 할 것이 있거나 가봐야 하는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루가 부족한 기분이 드는 것은, 느긋하게 거닐 수 있는 곳이 많은 카루이자와가 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리라. 눈이 즐거운 날씨와 느리게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잘 어우러지는 카루이자와의 푸름이, 고즈넉함이, 그냥 보내기엔 아쉬울 만큼 무척 좋았기 때문이리라. 꼭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은 여행지에게 있어서는 가장 멋진 칭찬 아닐까.
무엇을 해서 좋은 여행이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여행이 있다. 이번 여행은 딱 그 중간에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조급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내가 닿는 지역을 찬찬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기차여행이 주는 깨달음과 마음 아래로 차곡차곡 쌓아 올릴 기억들은 백점 만 점에 이백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