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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나누는 기쁨

토호쿠(東北) ¹아오모리

by 듭새


삿포로에서 신하코다테호쿠토로 가는 호쿠토 2호.


칸토 지방인 도쿄에서 홋카이도 지방인 하코다테까지는 하야부사로 4시간 정도 소요됐다. 그리고 하코다테에서 삿포로까지 또 호쿠토로 4시간 남짓. 이제는 최북단인 홋카이도에서 아래로 차근차근 내려가야 하는데. 도쿄 근처까지만 가려고 해도 8시간은 족히 잡아야 한다. 이동에만 하루를 날릴 수는 없기에, 건너뛰려고 했던 토호쿠 지방에 하루 묵고 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토호쿠의 아오모리.


아오모리로 가려면 열차를 세 번이나 갈아탄다. 그래서 아직 개찰구도 열리기 전인 새벽부터 삿포로역에 왔지. 이른 시간에 탑승한 호쿠토.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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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토에서 보는 해 뜨는 아침.


급하게 산 에키벤 하나를 까먹고 나니 창밖으로 해가 뜨는 게 보였다. 일정에 따라 제법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번이 가장 이른 시간이라 피곤할 법도 한데 여유로운 풍경을 눈에 담으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






눈이 쌓인 마을.


고즈넉하고 노릇하던 풍경이, 하코다테에 가까워질 즈음에는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 근처도 눈이 제법 내린 것 같았다.






눈이 쌓인 철길.


신호 덕에 잠시 열차가 정차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창밖의 이름 모를 마을을 찬찬히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 12월도 되기 전인데 벌써 눈을 두 번이나 본다. 아직 홋카이도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나는 풍경.






신하코다테호쿠토에서 신아오모리(新青森)까지 가는 하야부사 18호.


오늘의 두 번째 열차. 신아오모리까지 하야부사로 이동한다. 워낙 빠른 신칸센이니 한 시간 정도 이동하면 된다. 그래도 한 번 타봤다고 익숙한 기분이 드는 게 신기하지.






오늘의 창문 액자.


오랜 시간 열차를 타고 있으면 이따금 열차 창문이 액자가 되는 순간을 만나곤 한다. 커다란 창문 액자 안의 그림이 느리지만 빠르게 변하는 재미.


언젠가부터 좋은 것을 보고 예쁜 것을 보면 사진으로 담아두는 것이 일종의 습관처럼 굳어졌다. 그 순간을 사진으로나마 기록하는 것은 후에 야금야금 꺼낼 추억을 저장하는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너무 멋져서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은 사진에 전부 담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근사한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더라도, 내 두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의 반도 담기 어렵다. 그 아쉬움마저 전부 기록되는 것이 추억이겠지만.






신아오모리역 안의 자동판매기.


아오모리 하면 링고. 사과가 유명한 곳이라고 들었다. 아오모리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달랑 그거 하나 알고 왔는데 정말로 역 안에서부터 사과의 고장입니다 하고 알려주는 것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역마다 그 지역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는 이게 최고지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 지역은 이게 맛있어. 이게 유명해. 이걸 잘 만들어. 이것만큼은 우리가 최고야. 그런 자부심이 자신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도시가 아닌 곳들의 단단함을 좋아한다.






신아오모리에서 아오모리(青森)로 향하는 츠가루(つがる) 1호.


신아오모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좀 내려왔다고 눈이 비가 되다니. 정말로 홋카이도를 떠났구나 하는 생각 반, 처음 만나는 아오모리는 촉촉한 사과마을로 기억에 남겠구나 하는 생각 반.






아오모리역(青森駅).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그 상상이 맞아떨어졌을 때의 짜릿함. 혹은 전혀 상상과 다를 때의 새로움. 아오모리역은 후자였다. 아기자기한 단독 건물로 된 역의 모습을 생각했었는데 백화점도 연결되어 있고 호텔도 연결되어 있었다.






신마치도오리(新馬治街).


아오모리역에서 호텔까지 걷는 신마치도오리(新馬治街). 길을 따라 길게 지붕이 있었다. 아마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 이렇게 상점가에 지붕이 있는 것이리라. 덕분에 비가 내리는데도 우산을 쓰지 않고 호텔까지 갈 수 있으니 비 오는 곳이 이곳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뭐람.






야키토리 나오(やきとり直).
처음 먹어보는 이카멘치(いかメンチ).


호텔 근처를 걷다가 골목 모퉁이에 있는 야키토리 가게 앞에 멈췄다. 이카멘치(いかメンチ)라니. 멘치카츠는 좋아하지만 오징어가 들어간 멘치라니 먹어보기는커녕 본 적도 없어서 홀린 듯이 가게로 향하는 발.


막 튀긴 이카멘치는 바삭하고 뜨끈했다. 속은 촉촉하고. 부드러운 해물완자 같기도 하고. 처음 본만큼 처음 먹어보는 맛. 아오모리는 멘치카츠의 기본이 고기가 아니라 오징어라고 한다. 아오모리 사람들은 이카멘치가 전국에 다 있는 줄 안다고. 새로운 곳에 발을 디딜 때마다 넓어지는 식(食)견이 아주 통통해지는 중이다.





신마치도오리의 밤.


여행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숙소다. 호화로운 곳은 아니더라도 낡고 더러운 곳보다는 어느 정도의 쾌적함이 있는 호텔을 선택하는 편. 이번 여행에서는 그 기준과 가장 낮은 가격을 함께 충족시키려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 이상의 숙소를 몇 달 전에 미리 예약했어야 했고, 숙소비로 나가는 돈도 적지 않아서 가격도 최대한 줄였어야 했다. 작은 도시의 경우 호텔이 없는 곳도 있고 일정에 따라 금연실이 없는 곳도 있었다.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예약한 숙소의 상태를 알 수 없으니 기대와 불안을 함께 가지고 가는 거다.


오늘은 이동이 길기도 했고 비도 내리기도 했고. 전날에 묵었던 불편한 호스텔이었다면 푹 쉬지 못 했겠지만, 아오모리에 예약한 호텔은 기대 이상으로 쾌적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덕분에 호텔 안에서 늘어지게 충전을 하고 나니 해가 다 져서 밤이었다. 몸뚱이를 충전했으니 이제 뱃속도 충전해야지.






이자카야 벤케이 아오모리역전점(居酒屋 弁慶 青森駅前店)
꽃게와 생선, 새우 등이 들어간 나베 요리.


저녁 메뉴에 대한 고민이 많았었는데 많은 후보들을 밀어내고 이자카야가 당첨되었다. 비가 내려서 쌀쌀하기도 했고 따끈한 나베가 먹고 싶다는 짝꿍의 의견과 훌륭한 구글링 능력에 따라 그렇게 됐다. 그리고 아오모리에서의 이날밤이 우리의 이자카야 도장 깨기의 문을 열어버린 날이지 않을까.


너무나도 성공적이었던 나베요리. 식견(識見)을 이기는 식(食)견이 아주 포동포동해진 상태로, 전국 나베요리 탐방을 해야 한다고 어딜 가도 숙소 근처 이자카야 나베부터 찾아보는 짝꿍의 빠른 손놀림도 추억이다.






주문도중 오류가 난 이자카야의 터치패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황당한 이야기들이 생기는 지루할 틈 없는 인생의 주인공. 바로 나다. 멀쩡한 주문 터치패드가 갑자기 오류가 났다. 멋대로 혼자 꺼졌다 켜졌다 난리. 물론 우리보다 더 당황한 건 호출벨을 듣고 찾아온 아르바이트생. 잠시 기다려달라 말하던 낯이, 아니 멀쩡했던 게 왜 이렇게 됐지?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 한국에서 영화관에 갔을 때에 그런 일이 있었다. 예매한 영화의 상영 시간이 가까워져서 영화관 건물로 들어갔다.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었는데 주변 가게들이 전부 문을 닫아 주변이 온통 깜깜하길래 이 동네는 가게가 빨리도 닫네 하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영화관 층까지 올라갔더니, 영화관 층도 불빛이 거의 없었다. 쭈뼛거리며 걸어가자 주변을 정리하듯 걸레질을 하던 직원이 나를 보곤, "영화 보러 오셨어요?" 하고 묻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수도 없이 다녔지만 직원이 영화 보러 왔느냐 물어본 건 처음이라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내게 돌아온 대답은, 건물이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영화 상영이 어려우니 영화를 취소하라는 말이었다. 네? 응? 무슨 말이지. 영화관이 정전이라고? 아, 건물의 가게들이 전부 문을 닫은 이유가 그래서였구나. 그날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짝꿍에게 그랬다. 나랑 있으면 심심할 일은 없지?


그렇다. 나는 남들이 겪지 않는 일들을 많이 겪는 편이다.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예전에는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주변인 모두가 나를 지지리도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친구는 내게 너는 운동복 중에 운도 복도 없으니 그냥 동이야. 하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새부턴가 나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난 그런 사람이다 받아들이고 내려놓고 살았다.


그런데 작년부터 그 생각을 고쳐먹기로 다짐했다. 내가 운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일상에 특별한 일이 많이 생기는 즐거운 인생이라고.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나의 기분도 상황도 감정도 바꿀 수 있다. 나를 바꾸는 건 결국 내 생각이고 마음가짐이다. 그러니 나는 심심할 일 없이 즐겁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받은 주인공이다.






얏코이사브레(やっこいサブレ).


짐을 늘리는 것이 앞으로의 여행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기념품도 뭣도 사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을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여행으로 올 일 없을 것 같은 지역 곳곳을 다니는데 그 지역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들은 괜히 하나라도 사보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나는 인간이니 그것이 나의 마음이고.


아오모리역 안에 있는 아오모리 사과로 만든 특산품을 파는 곳에서 나와의 타협 끝에 구매한 것 중 하나인 얏코이사브레 아오모리링고캬라멜(やっこいサブレ 青森りんごキャラメル). 꼭 내가 먹지 않더라도 선물로 줄 수 있으면 좋으니까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항상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든 누구든 받으면 좋아하지 않겠나.


나는 받는 것도 좋지만 주는 것에 기쁨을 많이 얻는 편이라 금전적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주기는커녕 나를 챙길 능력도 아직은 턱없이 부족해서 늘 마음만 부자다. 이 마음이라도 나눠줄 수 있으면 나눠주고 싶다. 나눈 마음을 받은 누군가가 또 오늘을,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면 나는 몇 번이고 그 마음을 나누고 싶다.


그 생각으로 이 커다란 여행의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다. 나의 추억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간지럽고 즐거운 시간. 이 여행 기록을 읽는 분들께도 읽는 순간만큼은 그런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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