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부(中部) ¹나가노
하야부사는 도쿄-하코다테를 오가는 신칸센이다. 그래서 칸토에서 홋카이도로 올라갈 때 타고, 홋카이도에서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길에 조금씩 타고 있었다. 이제 위에서의 일정은 마무리 되었고 아래로 내려왔으니 다시 탈 일은 없겠지. 이날 토호쿠의 신아오모리에서 칸토의 오오미야(大宮)까지 탄 것이 마지막 하야부사였다. 저 청록색과 분홍색의 조합이 익숙해지던 차였는데 괜히 아쉽기도 하고.
오늘의 목적지는 츄부지방(中部地方)의 나가노(長野). 오오미야에서 나가노까지는 카가야키(かがやき) 523호를 타고 이동했다.
아오모리에 도착했던 날에도 아오모리를 떠나던 오늘 아침에도 줄곧 비로 축축한 날씨만 보다가, 파랗게 구름 몽실한 하늘을 보니 기분도 좋고 왠지 느낌도 좋고. 새로 찾는 츄부지방에서는 또 어떤 선물을 받게 될까. 여행 중 새로운 장소가 주는 선물은 예측할 수 없기에 더 기대가 된다.
Welcome to NAGANO!
역 안에는 역사(驛舍)의 역사(歷史)를 간단히 알려주는 그림이 반겨주고 있었다.
처음 나가노역이 생겼던 1888년의 불각(佛閣) 모양의 역사(驛舍)는 신칸센 개통으로 중축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호쿠리쿠신칸센(北陸新幹線)은 1998년에 열리는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 맞춰 1997년에 개통되었고, 새로운 노선의 호쿠리쿠신칸센의 개통에 맞춰 예전 불각 모양의 역사를 원하는 일부 의견을 반영해 처마와 나무 열주(列柱)가 있는 역사로 재건축된 것이 2015년. 나가노역의 유루캬라(ゆるキャラ)인 일본산양 캐릭터 나가모(ながも)는 2022년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짧고 간단한 역사의 역사.
2015년에 재건축을 해서인지 나가노역은 무척 깔끔하고 쾌적했다. 역과 이어지는 상점이나 음식점도 많고 맞은편의 건물로 이동할 수 있는 육교도 있다. 기념품이나 특산물을 파는 곳도 역에서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신칸센을 이용해 여행하는 이들의 오미야게는 문제없겠더라.
어릴 때부터 쇼트트랙을 좋아했어서 그런지 옅게나마 남아있는 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의 기억. 그 동계 올림픽의 성화대가 있다. 센트럴스퀘어 안에 작게 올림픽 메모리얼파크가 있고 그곳에 이렇게 성화대가 있었다. 역사도 우리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쟈가리코(じゃがりこ)는 나의 일본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간식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는 꼭 들어간다. 돌고 돌아 늘 먹던 기본 맛으로 돌아오곤 하지만, 그래도 시즌마다 기간 한정으로 나오는 쟈가리코는 새로운 계절의 묘미이기도 했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도 마찬가지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떤 쟈가리코를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곤 하니까. 나가노에서는 우마시오레몬맛(うま塩レモン味)을 만났다. 감자 스틱과 소금 레몬이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이지. 결과는 당연히 대성공.
요즘은 우리나라 과자도 계절이나 특산물에 따른 한정 상품들이 쏟아지는 추세이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그런 계절별 상품의 출시가 활발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그때도 계절한정과 기간한정 상품들이 숨 쉬듯이 쏟아졌다. 이 나라는 식품 회사 공장이 쉴 날이 없겠다는 생각도 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과자는 과자대로 초콜릿은 초콜릿대로. 맥주나 사와, 음료수에 아이스크림까지. 백화점 식품관에 가면 오미야게용으로 판매하는 케이크나 디저트류까지 뭐 하나 그 시즌에 맞춰 패키지가 변하지 않는 것들이 없었으니. 오래돼서 눅눅하거나 유통기한 지난 걸 살 일도 없겠네 싶었다. 사람은 한정(限定)이라는 단어에 자연스럽게 지갑을 열게 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이 나라에 한정판이 많은 건 활발한 경제활동을 위함인 걸까. 시답잖은 생각은 덤.
나도 짝꿍도 사원이나 신사에 관심이 없어서 젠코지에는 가지 않고 젠코지 오모테산도만 양방향으로 한 번씩 전부 돌았는데 주변 구경하면서 슬렁슬렁 걷기에 너무 좋았다. 파랗고 차가운 날씨도 한몫했고.
날을 잘 잡은 건지 원래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보통 오모테산도라고 하면 사람들이 제법 붐비는 곳이라 조금 걱정 아닌 걱정도 했었는데. 사람도 차도 많지 않아 조용하고 쾌적한 산책을 즐겼다. 늦가을과 초겨울 어드메의 차가운 공기를 온몸으로 만끽하면서.
처마와 나무 열주가 있는 역사로 재건축되었다는 그 모습.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에는 생각에 변화나 차이가 생기곤 한다. 이전 불각 모양의 역사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도 같고, 그래도 변화에 느린 일본이 저 큰 변화를 하며 어떻게든 찾았을 타협점을 생각하면 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저녁은 처음부터 이자카야로 정했기 때문에 메뉴를 정하는 것에는 망설임이 없었지만, 수많은 이자카야 중 어디로 들어갈지는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그렇게 선택해서 들어간 롯포오 하치베이. 풀네임은 우마이사카나토토리야키슛카 롯포오 하치베이(うまい肴と鶏焼酒家 六方 はちべい). 맛있는 생선과 닭구이 주점. 뭐 그런 뜻이겠거니.
박력 있게 양배추가 통으로 나오는 오토시(お通し)에 한 번 웃었던 기억. 처음 일본의 이자카야에 방문했을 때에 오토시라는 개념을 몰랐던 터라 아주 쌩돈을 뜯어가는구나 도둑놈들아. 하고 아까워하곤 했다. 지금도 이자카야에 따라 여전히 돈이 아까운 이자카야도 있지만, 어느 정도 오토시의 금액을 지불하는 것이 아깝지 않은 이자카야도 많다. 하치베이는 후자. 양배추도 달고 맛있고, 호두를 갈아 섞은 미소가 맛있었다.
그리고 이 이자카야를 택한 결정적인 이유였던 하치베이야키(はちべい焼き)가 무척 맛있었다. 하프 사이즈로 주문했더니 귀여운 항아리에 담겨 나왔다. 소스에 재운 나가노산 닭고기를 구워 항아리에 담아 나오는데, 일반 야키토리와 또 다른 맛과 모양. 세상에는 정말 여러 가지의 요리가 있고 여러 방법으로 재료를 조리한다는 걸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계속 느낀다. 역시 맛있음에는 끝이 없다.
현재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일본에 있을 때만 해도 세이유(SEIYU)가 있으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있었다. 그 정도로 편리한 슈퍼마켓인 세이유. 그리고 내게는 꽤 그리운 추억의 일부에 늘 존재하는 친숙한 곳이기도 하다.
운이 좋게도 일본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이타마의 셰어하우스 근처에는 세이유가 있었고 덕분에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나는 날에도 밤늦게 장을 보러 가는 일이 가능했다. 바로바로 세이유는 24시간 영업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동네의 작은 슈퍼마켓보다 몇 엔씩 비싸다는 이미지가 있긴 하다. 덕분에 사이타마에 살 때는 여러 슈퍼마켓의 가격비교를 하며 다녔더랬다. 배는 고프지만 수입은 많지 않았던 추억의 조각 하나가 또 이렇게 떠오른다.
여행 중 무언가를 보고 어딘가를 보고 떠올리는 기억이 있다는 것에, 새삼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구나.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곤 한다. 부러움을 살 정도로 호화스럽거나 근사한 일들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주 사사로운 일에도 바람 빠지는 웃음 한 번 짓는 것이 행복한 나 같은 사람도 분명 존재할 테니까.
어느 한 지역을 속속들이 파고드는 세세하고 꽉 찬 여행이 아니라 나무보다 숲을 둘러보는 커다랗고 느슨한 여행이다 보니 방문하는 곳의 유명한 관광지라거나(원래 사람이 많은 관광지를 즐기지 않기도 하고) 꼭 가봐야 할 곳을 건너뛰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건 이렇게 긴 여행이 아니라 짤막한 여행일 때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이번 여행은 전체적으로 이동하는 일정에 가장 큰 시간을 할애하고 힘을 실었기 때문에 보다 더 헐렁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진득하게 나가노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의미. 잔잔한 하루를 보낸 나가노에서의 기억이 또 이렇게 작은 행복 한 조각이 되어 추억으로 남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