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사이(関西) ²나라
사람으로 붐비던 교토를 빠져나왔다. 교토에서 나라까지는 따로 기차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전철을 이용한다. 덕분에 많은 사람을 태운 꽉 찬 전철을 타고 50분 정도 쾌속 전철을 타고 이동했다. 날이 좋아 창밖을 보는 눈이 즐거웠다.
교토나 오사카에서 한 시간 정도면 전철로 도착하는 곳이기 때문에 당일치기로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다 보니, 이른 시간부터 나라역에는 사람이 많았다. 교토랑은 또 다른 느낌으로 붐빈다.
역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산조도오리를 따라 상점가가 즐비해있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열지 않은 가게도 많고,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서 들어가는 가게도 많았다. 다들 부지런해. 나만 부지런하게 구는 게 아니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 만난 연못. 사루사와이케(猿沢池). 이 연못도 나라공원의 일부에 속하겠지만 이쪽은 본격적인 나라공원의 느낌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산조도오리의 끝이나 처음을 알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라에 다시 가고 싶은 이유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 짐을 끌고 숙소까지 걸어가면서도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서 연못만 멍하니 바라봐도 좋겠다고.
나라는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교토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교토나 오사카가 칸사이지방을 대표하는 관광지라면, 나라는 관광지 속의 관광지의 느낌이 강하다. 일단 밤이 화려하지 않고, 유흥거리가 많지 않은 느낌. 안 그래도 처음 나라의 숙소를 찾을 때 다들 교토나 오사카에 숙소를 잡고 당일치기를 하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나라는 숙박시설이 그다지 좋지 않더라. 전철로 한 시간이면 오는데 굳이 나라공원 외에는 크게 관광할 것이 없는 곳에서 1박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에서 1박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런 조용하고 한적한 골목들이 많아 걸어 다니기 좋을 것임이 분명하기에. 실제로 나는 나라공원을 반경으로 많이 벗어나지 않았던 주변만 돌아다녔지만, 그것만으로도 참 좋았다. 밥을 먹으려고 식당 하나를 찾더라도 조용한 골목 사이를 거닐고 구경하는 것이 무척 만족스러웠으니.
나라에서의 첫 식사는, 마파두부 라멘으로 유명하다는 스스루카, 스스란카(すするか、すすらんか。). 너무 한적한 구석 골목 안쪽에 작게 위치하고 있어서 한참을 헤맸다. 그러고 보니, 이쪽인가 아닌가 저쪽인가 하는 중에, 어떤 일본인 남성이 우리와 같은 모양새로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을 봤다. 핸드폰을 한 번 보고 골목을 한 번 보고, 이쪽으로 걸어갔다가 다시 저쪽으로 걸어갔다가. 저 사람은 분명 우리와 목적지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길래 아닌가 보다 했더니, 가게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나니 그 남자가 뒤를 이어 들어왔다. 역시 동족이었던 것. 일본인도 궁금할 거다. 마파두부와 라멘의 만남이라니.
마파두부 라멘은 국물이 없는 것과 있는 것으로 나뉜다. 둘 다 무척 맛있었고, 세트로 먹을 수 있는 오이메시도 계란을 쪼개서 같이 먹으니 마파두부랑 잘 어울렸다. 아는 맛과 아는 맛이 더해졌는데 그게 식상함이 아니라 더 맛있는 아는 맛이 되는 게 신기했다. 나라에서도 넓어진 식(食)견이 반갑다.
밥을 먹었으니 또 걸었다. 날이 너무 좋아서 여기저기 참 많이도 걸어 다니다가 본격적으로 나라공원 탐색을 위해 왔다. 그리고 만난 첫 사슴. 이때까지만 해도 사슴 한 마리에 신기해서 우와우와 호들갑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슴을 볼지 상상도 못 하고 말이지.
사람은 많지만 아주 넓고 큰 공원이라 그렇게 사람들과 많이 부대낄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날이 너무 좋아서 파란 하늘과 아직 여름이 덜 떨어진 녹음이 공존하는 것을 한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리고 사슴의 늪에 들어왔다. 어딜 가도 사슴이 있었다. 여기에 사람이 이만큼, 저기에 사슴이 저만큼. 사슴이라고 하면 어릴 때 본 '밤비'의 이미지가 큰데, 사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있는 사슴들이라 그런지 그렇게 반짝반짝 생기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언젠가 봤던 호주에 사는 무기력한 캥거루들을 보고 있는 느낌에 가까울까. 어쨌든 밤비는 아니었다. 인간이 미안해. 동물원이 아닌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사슴으로 바글바글한 공원 안에서 슬슬 기가 빨리는 것이 느껴지기도 하고, 더는 그 사람들 속에 섞여있는 사슴을 보는 것이 불편해지기도 해서 그 공간을 빠져나와 주변을 걸었다. 차도를 따라 인도가 생각보다 잘 되어있어서 오히려 흙바닥인 공원보다 더 쾌적하게 걸었다. 날이 워낙 좋아서 호수도 반짝거리고 나무는 알로록달로록이고. 사슴공원보다 더 기억에 남는 주변 산책길.
이쪽 차도까지 사슴이 나오곤 하나 보다. 사슴을 주의하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오며 가며 사람을 마주칠 일이 그리 많지 않은 인도를 따라 걸어 다녔더니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사람이랑 부대끼는 것을 싫어하면서 여행은 잘도 다닌다 싶지.
사루사와 연못을 처음에 봤을 때, 여긴 밤이 되면 정말 예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가 지니 연못에 하늘이 내려앉으면서 풍경의 멋짐이 더 힘을 키웠다. 노릇노릇 물드는 중이던 하늘이 잔잔하게 수면에 그려지는 것이 행복할 정도로 장관이었다.
저녁 식사는 짝꿍의 검색 뽐내기. 나라사카구라나베(なら酒蔵なべ)라는 나베 가게로 정했다. 조용하고 깨끗한 골목 안쪽으로 찾아 들어온 가게인데, 워낙 유명하고 인기가 많아서 예약 없이는 먹기 힘들다는 말에 쭈뼛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빈자리가 한 자리 남아있다는 안내를 받고 들어왔더니 아무도 없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저게 모두 다 예약석이다.
나베와 코타츠라니. 그 따뜻함과 나른한 기분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반가움을 감출 수 없었다. 꼬물꼬물 코타츠 안으로 발을 넣고 메뉴를 주문하고 있으니 금세 가게 안이 가득 찼다. 정말 우리가 운이 좋았던 거였어.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나베 육수가 다른 곳들과는 다르기 때문일 테다. 가게 이름인 사카구라(酒蔵, 술창고)라는 이름에서 알려주듯이 육수에 술이 들어가는 나베. 가장 유명한 메뉴인 사케카스쿠로우토나베(酒粕玄人鍋)를 주문했는데, 닭 육수에 사케카스(酒粕, 술지게미)를 더해서 만들어지는 나베라는 설명.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기대치만 열심히 오르고 있었는데, 무슨 기대를 해도 기대 이상인 음식을 또 찾아버렸다. 나라에서 종을 울리는 우리의 식(食)견. 정말 어디서도 먹어보지 못 했던 맛이라 굉장히 기억에 오래 남았다. 이걸 먹기 위해 굳이 굳이 나라까지 간다? 대찬성입니다. 가. 가야 돼. 갑시다.
당일치기 관광지의 밤 풍경은 이렇게 역이 붐빈다. 정확히는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나오는 사람은 없고 들어가는 사람만 있는 나라역의 밤. 다들 안녕히 가세요. 우리도 숙소로 돌아가서 내일을 준비해야지.
숙소까지 오르는 상점가도 전부 불이 꺼졌다. 화려하지 않은 밤. 조용한 밤. 이것이 나라가 교토나 오사카와 다른 가장 큰 부분이지 않을까.
숙소가 사루사와 연못 옆에 있는 것을 이렇게 감사하다 생각할 줄이야. 밤에 예쁠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까지 좋은 의미의 충격을 줄 것이라는 기대는 안 했는데.
어느 쪽으로 거닐고 어디에서 봐도 너무 맑고 선명한 광경에 눈이 다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연못에 그대로 담긴 적당히 푸릇한 밤하늘. 손으로 물을 뜨면 하늘이 떠질까, 손으로 만지면 저 별도 잡힐까. 동화 같은 생각을 자꾸 하게 만들던 나라의 밤이 내게 준 행복한 선물. 그 선물을 받던 차가운 공기를 머금은 밤. 화려함이 없어도 반짝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 수수하고 잔잔했던 나라의 밤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