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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bambi Jul 02. 2018

결혼 혹은 결혼의 책에 대한 변명

결핍에서 비롯되어 실패를 기다리는 문장들


배송비와 만나기 시작할 무렵 각자 가진 책을 서로 바꿔서 본 적이 몇 번 있다. 배송비에게 처음 빌린 책이 데이비드 실즈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였고 나는 책을 펼치자 마자 즉각적으로 반해버렸다. 이다혜 기자님은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썼다. ‘멋진 논픽션이라면 마지막 대목이 글 전체를 요약하거나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흐름상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생각을 품고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배웠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된다.’ 그러니 이 책이 궁금한 분은 꼭 구해서 보시길.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이 책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책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반복적으로 일화나 인용, 유머를 통해 드러나는 주제는 ‘삶에서의 실패가 어떻게 언어를 찾는가, 그리고 언어는 또 어떻게 실패하는가’인 것 같다. 


작가는 어릴 적 말더듬증에 시달렸다고 고백하며 이 주제로 자전적인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는 어릴적 경험한 말더듬증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된 것이 아니다.  


내게 글쓰기는 말더듬증과 단단히 얽힌 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도 그렇다. 글쓰기는 ‘나쁜 언어’를 ‘좋은 언어’로 바꿀 가능성을 대변했다/한다. (중략) 언어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요소이므로, 나는 말을 더듬을 때면 진심으로 비인간화하는 기분이다.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을 글로 씀으로써, 음, 존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심리적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역시 말더듬증 때문에, 쓰기와 읽기를 작가와 독자 간의 핵심적인 소통 방식으로 귀하게 여긴다.  


어디선가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대부분이 이중 언어 환경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를 보았다(내가 ‘어디선가 본 것’의 출처는 대부분 트위터이다…) 이 사실은 언어적 자극의 풍부함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쩐지 말더듬증과 이중 언어 사용의 공통점에 더 주목하게 된다. 언어 기능은 거의 인간에게 ‘내장되어’ 있고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정말 숨쉬듯 자연스럽게, 의식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말을 한다. 언어에 서툴렀던 시절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말더듬증이 있는 사람들과 이중언어 사용자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얼마 동안은 하나의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하기 위해 많은 주의와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그래서 언어에 거리를 두게 된다. 우리의 언어가 그렇게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게 된다.  


데이비드 실즈는 말한다.  

말더듬증의 불행한 점은 – 내가 지금 벤의 나이 때 자전 소설 <죽은 언어>의 소재가 말더듬증이었다 – 그것 때문에 내가 사랑, 미움, 기쁨, 깊은 고통처럼 전통적이고 진정코 중요한 감정을 표현할 때조차 자의식을 완전히 떨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항상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먼저 인식하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더듬지 않고 표현할 최선의 방법부터 생각하다 보니, 내게 감정이란 남들에게나 속하는 것, 세상의 행복한 소유물일 뿐 나로서는 솔직하지 않은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는 말을 더듬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다(범행 현장으로 돌아가서 피 묻은 지문을 추상표현주의로 바꾸려는 시도이다). 작가로서 나는 우주의 어떤 원소만큼이나 언어를 사랑하지만, 또한 언어가 아닌 다른 것 속에서 사는 데 애를 먹는다. 내게는 글로 적지 않은 경험은 진정으로 겪은 게 아니다. 언어는 감옥에서 도피처로 변했다가 다시 감옥이 되었다.  


저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의 화자 미조구치는 거의 비슷한 취지로 좀더 과격하게 진술한다. 

말더듬이가 첫마디를 소리내기 위해 몹시 안달하는 동안은 마치 내부 세계의 농밀한 끈끈이로부터 몸을 떼어내려고 버둥거리는 새와 흡사하다. 겨우 몸을 떼어냈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물론 외부 세계의 현실은 내가 버둥거리는 동안 휴식을 취하며 기다려줄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다려주는 현실은 이미 신선한 현실이 아니다. 애써 간신히 외부 세계에 도달해봐도 언제나 그곳에는 순식간에 변색되어 어긋나버린...... 더구나 그것만이 나에게 어울릴 듯이 여겨지는 신선하지 못한 현실, 거지반 썩은 냄새를 풍기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어렸을 적 언어 기능에 문제가 있었던 작가가 정말 많을까? 지금 생각나는 건 한동안 실어증을 앓았다는 파스칼 키냐르 정도이다. 찾아보면 더 나오겠지만 아무렴 작가들 중에는 장애를 경험하거나 장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독하게 어눌한 사람보다는 달변가에 타고난 이야기꾼들이 더 많을 것 같긴 하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들이 ‘진정한 소통’에 능하지는 않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재미가 있다. 언어적, 비언어적 소통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뭐하러 글 같은 걸 쓴단 말인가?  


데이비드 실즈는 ‘인간이라는 동물은 왜 이렇게 슬픈가?’라고 묻지만, 모든 인간들이 똑같이 슬프지는 않다는 걸 저자도 독자들도 알고 있다. 인간은 모두 슬프지만, 책을 읽는 인간이 더 슬프다. 그리고 그보다 더 슬픈 건 책을 쓰는 인간이다. 작가들은 경험의 주인공보다는 관찰자이다.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온전하게 참여하지 못하며 거리를 둔다. 현실의 삐걱거림에서 달아나기 위해 언어에 필사적으로 매달리지만, 언어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믿을만하지 못한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언어는 우리를 실패시키는 데 실패하는 법이 없고, 우리를 패배시키지 못할 때가 없고,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그러나 지금 나는 이렇게 말라붙은 풀로 종이를 붙여 그 갈라진 틈을 가리려고 애쓰고 있다.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이 책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결혼에 대한 책에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나 길게 하고 있다. 배송비가 처음 책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고, 일단 동의를 하긴 했지만 한동안 꽤 혼란스러웠다.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배송비에게 물어보았던 것 같다. 그 땐 스스로 뭐가 혼란스러운지도 분명하지 않아서 모호한 질문들을 했다. “음. 그러니까 이 책의 목적이 뭐지?” 배송비는 아마 결혼을 하는 이유,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한 선언 같은 걸 담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럼 이 책의 예상 독자들은 누구야?” “글쎄. 우리를 아는 사람들?” “그런 책이 재미가 있을까?” “재미있지 않을까?” 


아마 배송비는 책을 읽을 사람들보다는 책을 만드는 우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건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왕 책을 만들거면 재미가 있거나 의미가 있거나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안 읽을 책을 뭐하러 만든단 말인가. 지금도 이 부분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돈 받고 파는 책이 아니니까 괜찮다’는 식으로 나름대로 스스로 타협했다(그래도 나무들에게 미안한 건 어쩔 수 없다.). 내 생각에, 돈 받고 팔 책은 이런 식으로 만들면 안된다. 신혼 부부들에게 결혼 준비 과정에서 참고가 될만한 정보가 있다든가, 정말 어떤 정치적 실험으로서 새로운 형태의 결혼을 제안한다든가, 아니면 세밀하고 정교한 묘사를 통해 우리 세대의 결혼이 어떤지에 대한 인류학적인 기록으로서 가치가 있다든가 해야 할 것 같다. 아니면 재미가 있어야 할텐데, 우리 책은 별로 그렇지 않으니까.  



나는 이 책이 실패하길 바란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잘 써지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일 것 같기도 하다. 재미있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미가 없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인 재미를 느끼는 것들은 갈등, 긴장, 위협, 좌절 같은 것들이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 이건 아주 대중적인 믿음이고 나 역시 이런 미신 혹은 진실을 전적으로 믿고 있다. 결핍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굳이 생각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심리학자들은 경계선 인격장애를 위한 대표적인 심리치료 체계인 ‘변증법적 행동치료’를 개발한 마사 리네한 본인이 지독한 경계선 인격장애로 고통받았다는 사실에 심드렁하게 반응한다. 얼마나 많은 정신과 의사들 그리고 심리학자들이 지독한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는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 중에서도 자신이 욕망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다시 데이비드 실즈: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우리가 무언가 추구할 때, 경계할 때, 문제를 풀 때는 뇌에서 보상과 쾌락을 통제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분비된다. 우리가 바라던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도파민 분비는 끊긴다. 
내가 경계할 대상은 나 자신이다. 나는 늘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성애화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 인생에 들어오면, 그 순간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만큼이나 내게도 놀랍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리스어 ‘에로스’는 ‘부족’ ‘결핍’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을 뜻한다. 연인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원한다. 그가 원하는 것을 갖게 되기란 정의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갖게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문학도 영화도 노래도 아닌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난 아무래도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을 뜻할까봐 두려운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할 필요를 느끼고, 그것에 대해 말할 필요를 느낀다는 게 우리의 사랑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의미일까봐 두렵다.   



작가들이란 얼마나 자의식이 강하고 에고이스틱한 사람들인지. 작가, 좀 더 범위를 넓혀 예술가가 사랑과 삶 앞에서 얼마나 무능한지 보여주는 작품과 일화들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내가 본 것 중에 최악은 엠마뉘엘 카레르의 <러시아 소설>이었다. 앞서 <문학은 어떻게…>는 강력하게 추천했지만 이 책은 웬만하면 읽지 않는 편을 권하고 싶다. 혹시라도 궁금증이 동하실 분들을 위해서 줄거리를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 흥미를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도 든다. 1세계 지식인 남성의 자기연민을 들어주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엔 인생은 짧고 세상에는 훌륭한 책이 너무 많다.  


이 책은 두 가지 축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2차 세계 대전 때 실종되었다가 50년이 지나 러시아의 정신병원에서 발견되어 본국으로 송환된 한 헝가리 병사의 자취를 따라 작가가 다큐멘터리 촬영팀과 함께 러시아 여행을 떠난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작가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 책의 화자는 어떻게든 말할 거리를 찾아서 삶 주변을 배회하고 집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느껴진다. 전자의 축에서는 자신의 삶에 없는 결핍과 지독하고 절대적인 타자성을 찾아 타인의 삶을 집적거리며, 후자의 축에서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독하고 끔찍하게 여겨지는 부분을 전시한다. 솔직한 나의 감상은 ‘음, 쓸 이야기가 없으면 그냥 쓰지 않았으면 좋겠군.’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재미있을 것이고 나도 솔직히 재미가 없다고는 못하겠다.  


아무튼 책에 대한 불평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은데 내가 정말 학을 뗀 부분은 작가의 여자친구와 관련된 내용이다. 여자친구는 작가 자신, 그리고 자신이 어울리는 사람들과 다르다.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여자친구가 자신과 다르다는 점에서 끌리지만, 그런 점들 때문에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느끼기도 한다. 아니 꼭 그런 점들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작가는 몹시 취약하고, 친밀감에 두려움을 느끼며,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위태롭게 삐걱거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가가 선택한 방법이 몹시 인상적인데, 주간지에 여자친구만을 위한 단편소설을 게재하는 것이다. 여자친구가 오랜만에 자신을 만나러 오는 길에 그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시간과 동선을 일견 치밀하게, 사실은 허술하게 계획한 서간체의 소설. 작가는 틀림없이 여자친구가 그 소설을 읽고 크게 감동하고, 둘의 사랑은 근사하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계획은 실패하고 둘의 관계는 끝을 맞는다. 여자친구는 작가가 의도한 시간에 기차에 타지 않고, 당연히 르몽드에 실린 그녀만을 위한 소설을 읽지 못한다. 하지만 만약 여자친구가 기차에 탔다고 하더라도, 계획이 성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나와 연인의 사적이고 은밀한 부분을 만천하에 떠들썩하게 공개하며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행동을 하며 원하는대로 느끼길 바라는 연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내겐 너무나 어려워 보이는 일이다. 헤어지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에게 나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긴 했을까 생각했을 것 같다. 아무튼 엠마뉘엘 카레르는 또 그 사연을 구구절절 기록해서 다시 책으로 출판하기까지 한 것이다.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최악의 남자친구다.  


하지만 이런 이기적이고 자의식과 유아론의 덩어리인 연인이 엠마뉘엘 카레르만은 아닐 것이다. 왜 나는 그런 남자를 제대로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세상에 그런 못난 남자들의 고백이 넘쳐나기 때문 아닐지. 너무나 익숙하고 전형적이다.  


배송비는 가끔 ‘언젠가는 애절한 사랑 노래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한다. 왜 그런 걸 해보고 싶어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솔직히 배송비가 애절한 사랑 노래를 만든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게 좋고, 앞으로도 애절한 사랑 노래 같은 건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독히 이기적인 바람이다. 사실은 배송비보다는 내가 저런 엠마뉘엘 카레르 같은 인간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그럴 수도 있지만 너는 그러면 안 돼. 한편으로는 그러면서도 나는 적어도 이 사랑에서는 삶에서 실패하느니 예술에서 실패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도 한다(내가 낙관적인지는 몰라도 삶에서도 예술에서도 실패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변변찮고 시시하며 지루했으면 좋겠다.  



한편 문제는 우리가 SNS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에 대해 자꾸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은 그것이 결핍되어 있다는 증거이다’라는 생각은 왠지 예전보다는 오늘날 더 영향력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일상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기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시하는 인스타그램의 시대. 사람들이 ‘나만 빼고 모두들 행복해 보여요.’라며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인기 있는 처방 중 하나는 ‘정말 행복하고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열심히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지 않아요.’이다. 글쎄 이 처방에 얼마만큼의 진실이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앞에서 열심히 전개한, ‘진정한 소통에 어려움을 경험하는 사람이 작가가 된다’라는, 믿고 싶고 재미있지만 검증은 어려운 이론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튼 나도 그런 식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어서, SNS 상에서 활동적이고 부유하며 인기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의 내면은 정말 공허하기 짝이 없을 거라고 치부해 버리곤 한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기념해서 책을 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뭘 저렇게 유난을 떠는걸까, 사실은 정말로 행복하지 않을거야.’ 라고 생각할까봐 겁내는 것 같기도 하다. 구구절절 변명을 해야 할 것 같다. 


6

 

딜레마를 피해갈 멋진 설명이 떠올랐다.  


나와 배송비는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의심하거나 의문을 가질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결혼, 정확히 말해 결혼식에 대해서는 아직도 둘 다 완전히 입장이 정리되지 않은 것 같다. 여러가지 복잡한 절차가 있으니까, 때때로 귀찮기도 하고 굳이 이걸 해야 할까 싶어질 때도 많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 장애물이 생긴다면 그냥 결혼식을 하지 않는 것을 고려하고 있기도 하다. 결혼식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아마 큰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을 것이고, 결혼식을 한 뒤에도 지금과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책을 만든다는 것은 썩 자연스럽지 않은 과정이다. 모든 인공적이고 의도적인 작업은 어떤 결핍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아마 결혼에 대한 확신인 것 같다.  


배송비는 책을 만들면서 결혼을 하는 이유를 담겠다는 말을 종종 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내용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고 일단 책을 만들면서 이유를 찾아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서로 이야기를 하고 글을 써봐도 결혼식을 하는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배송비는 결혼에 대하여- Side B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있지만 어쩐지 궁색하게 느껴지는 건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결혼을 한다. 별로 안 할만한 이유가 없고, 우리에게 중요한 어른들이 원하시니까 한다. 책은 결혼을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이제 이 자체가 목적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결혼에 대해 말할 필요를 느끼고 고민의 흔적을 담은 책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더 이상 결혼이 그렇게 정당하며 당연한 과정이 아님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아직은 결혼을 하는 것보다 안 하는 데 더 이유가 많이 필요한 세상인 것 같다. 하지만 그 반대의 세상, 결혼을 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 세상이 오래지 않아 올 것이고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혹시라도 책에서 결혼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우리도 잘 모르겠다.  


갑자기 앞의 토막들을 모두 지워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7

 

책을 만들면서 얻게 되는 부수적이지만 중요한 효과는 냉소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실즈가 아무리 자신이 삶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언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체험한다고 말해도, 그는 문학에 대한 사랑을 통해 삶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엠마뉘엘 카레르는 자기 머리 속에서만 사는 이기주의자이지만, 어쨌든 그는 그 모든 것을 드러낼 용기는 있다. 다른 사람들의 SNS를 보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사람들보다는, 그 아래에 어떤 동기와 욕망이 있든 수십장의 셀카 중에 맘에 드는 한 장을 골라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람이, 조금 모호한 표현이긴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자격도 가능성도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비록 내 주변의 아주 작은 세상이긴 하지만, 오해와 실망과 나도 모르는 나를 간파하려는 시도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세상으로 나의 목소리를 전한다. 말들은 실패하겠지만, 다른 어딘가로 나를 데려다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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