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 유병기 (有病記)
나 계란도 못 먹어
밀가루는 생각보다 대체품이 많았고 처음의 막막함은 곧 익숙함으로 바뀌었다. 사실 적응하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밀가루 식이제한 이후 실시한 혈액 검사에서는 혈색소와 저장철 수치가 모두 증가했다. 철결핍 빈혈이 호전 중인 것 같다는 소견을 들었다. 처음 혈액검사를 한 지 1년 2개월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이제야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소화기 영양과에서의 진료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여전히 알레르기 호산구 수치가 높았으며 잠혈도 검출되었다. 이후 몇 번의 진료를 더 봤지만 혈액 검사 수치만 호전되고 있었고, 소화기 영양 검사 결과는 여전히 오락가락했다. 다시 진행한 알레르기 검사에서 계란에 대한 반응이 나타났고, 계란의 식이제한이 결정되었다. 엄격한 제한이 필요한 수치라고 했다.
밀가루 식이제한을 겪으면서 단순히 계란을 안 먹으면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막막했다. 밀가루는 대체품이 있었지만 계란은 대체품이 없었다. 밀가루와 계란을 먹지 못하면 대체 아이는 뭘 먹어야 할까. 유치원에서도 아이의 알레르기 상황을 듣더니 이런 경우는 처음 봤다며 걱정해 주었다. 돈가스도, 스타벅스에서 판매하는 카스텔라도, 쌀케이크도 이제 먹을 수 없었다. 밀가루를 사용하지 않는 빵집에서도 계란은 사용하고 있었다. 당연히 계란과 밀가루가 들어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제품들도 뒷면에 밀, 계란 함유가 기재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아이가 좋아했던 간식은 떠먹는 과일 젤리와 팝콘이었다. 우리 가족은 비건과 거리가 멀었지만 비건 빵집이 그 시기의 우리에게 큰 힘이 돼주었다. 비건 빵집에서도 밀가루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밀가루조차 사용하지 않는 비건 빵집을 찾는 건 어려웠지만 다행히 집 주위에 딱 한 군데 있어 유치원 대체 간식이 필요한 날에 들려 보낼 수 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추운 날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온갖 비건 빵집을 수소문해 계란과 밀가루를 쓰지 않는 크리스마스 시즌 케이크도 찾아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먹었던 케이크를 식이제한 때문에 건너뛴다면 아이가 마음이 속상할 것 같았다.
다행히 아이는 계란까지 못 먹는 상황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갈비탕에 들어있는 계란 지단을 먼저 발견하고 빼달라고 나를 독촉했고, 새로운 것을 먹기 전에 "이거 계란 들어갔어요?"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식이제한을 하는 내내 아이는 속상한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었지만 어느 날 밤, 아이는 자기 전에 자신도 오므라이스가 먹고 싶다고 엉엉 울었다. 그때가 유일하게 식이제한에 대한 속상함을 표현한 날이었다. 나는 아이를 달래면서 같이 눈물을 흘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 상황에 대해 아이가 자책하지는 않았을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알레르기 검사에서 밀가루에 대한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그래도 안전하게 시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며 일단은 밀가루와 계란을 제한하고 2개월 후 밀가루를 시도해 보자고 하셨다. 계란과 밀가루를 끊고 진행한 혈액 검사에서 혈색소와 저장철 수치가 모두 정상 범위를 넘어섰다. 치료를 시작한 지 1년 9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무엇보다 저장철 수치가 정상 범위에 들어간 게 놀라웠다. 차마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던 수치가 이제 13.5로 정상 범위인 12를 넘었다. 평균 수치인 30-400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치지만 우리는 모두 만족했다. 이런 결과는, 힘들지만 식이 제한을 멈출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