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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Aug 05. 2016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보고

영화#05

 구경남(김태우)이 부상용(공형진)에게 했다가 12일 뒤 제주도에서 다시 돌려받게 되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이다. 편지의 수신자가 정작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지점에서 이 영화는 끝난다.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은 되돌아온다.


 노화가의 후배(하정우)는 왜 울어야 했을까? 그가 본 것은 단순한 불륜 장면이 아니었다. 그는 여기서 한 편의 영화를 본다. 그는 구경남을 매개로 자신의 욕망이 상연되는 장면을 침대에서 뒤늦게 본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스크린 위에서 부유하는 기표들, 매번 우리가 영화관에 찾아오도록 유혹하는 이미지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품고 있는 욕망이라는 사실.


 여기에 욕망의 본질이 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말은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할 수밖에 없는 주체의 무능력함을 겨냥한다. 마찬가지로 관람객의 욕망은 영화의 욕망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관람객)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 지를, 영화를 통해서 뒤늦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영화만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이 영화를 모방하기도 한다.




 현실의 욕망은 코드화 되어 있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이미지화하거나, 발화함으로써 이 욕망의 경제 속으로 편입된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욕망의 정형화된 구조에 일격을 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여성의 목소리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구경남 애인의 목소리-"정말 미안한데 못 가겠어."-(V1), 화장실에서 술에 취한 공현희(엄지원)의 음성 (V2), 노화가와 함께 방에 들어간 여학생의 신음소리 (V3), 마을 사람들에 대한 고순의 일갈-"앉아 있어요 좀!"-(V4) 등이 바로 그것이다. 모두가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들려와서 프레임 내부에 자리한 인물들을 가격한다.


 V1이 구경남의 평화로운 제천 여행을 방해했다면, V2는 흥행감독(김연수)의 권위를 무너뜨리며, V3는 구경남과 고 국장(유준상)의 관계를 파열시키고, V4는 기세 등등했던 노화가의 후배(하정우)를 굴복시킨다. 이어지는 다음 씬에서 그는 펑펑 울기까지 하는데, 이때 그를 울게 만드는 것도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화가의 목소리다.


 우리 몸에 속해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 몸의 외부에서 들려오는 것이 바로 이 목소리다. 목소리는 인간의 성대의 진동을 통해서 발음되기는 하지만, 결국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전해지는 음파인 셈이다. 녹음된 우리 목소리가 언제나 낯설게 느껴진다는 사실은, 우리도 우리 자신을 끝내 알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영원한 징후가 아닐까.

  


  



ps.


 내가 이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있는데 고 국장의 다그치는 전화에 구경남이 '형이나 위선 떨지 마'라고 말하며 끊는 장면이다. 이 시점에서 그는 고 국장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확인한다. 바로 그다음 씬에서 구경남이 고순의 편지를 읽게 되는 것은 그래서 필연적인데, 이때 그는 당장은 그녀에게 (연락하거나) 달려가지 않는다.


 제천에서 부상용의 아내(정유미)를 갈망했던 자신의 욕망을 소급적으로 깨달으면서, 동시에 거기에 부과되는 죄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잠시나마 제천에서의 부활한 죄의식으로 제주도에서 태어난 욕망을 억눌렀던 그가,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은 공항에서 출국하려는 고순의 남편(노화가)을 확인한 이후이다.


 결국 고순을 향해 달려가는 구경남을 보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죄의식만으로는 인간의 욕망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가정할 수 있는 다른 판본이 있다면 고 국장의 욕망에 대해 비난하지 않고 그냥 흘려듣는 구경남, 그래서 고순의 편지를 끝내 펼쳐보지 않고 제 갈 길 가는 구경남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영화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결국 이러한 죄의식을 통해서 욕망이 재기입되어야만 영화의 서사는 흘러갈 수 있는 것이다. 서사는 욕망이 투영된 창이다. 그래서 욕망이 없으면 서사도 없고, 영화도 없다. 그래도 서사 없는 영화는 가능하다. 물론 재미는 덜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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