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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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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Aug 25. 2020

한바탕의 겨울 꿈

돌아온 탕자 아닌 찰떡이, 20191221




오후 네시, 아빠는 아가의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곤 차에 실었다. 그는 '얼른 다녀올게'하며 조금 신난 얼굴을 했던가. 몇 시간 전이건만 설렌 감정은 몇 달처럼 멀다. 찰떡이는 오늘부터 12월 24일 아침까지 안산 집에서 머물 예정이'었'다. 시어른의 이해와 배려로 얻은 3박 4일의 자유, 평생 받아보지 못했던 산타의 선물을 그들을 통해 처음으로 받는 기분이었다.

지금의 나로선 그 어떤 물질적인 것보다 소중한 시간과 여유 + α 잠이라는 선물을.



분유 포트, 젖병 소독기, 뉴나 바운서, 젖병 8개, 젖병 세척제, 아기 내복 6벌, 아기 조끼 3벌, 가제 손수건 20장, 아기 비데, 아기 욕조, 로션, 오일, 체온계, 분유 한 통, 비판텐, 손 싸개 3벌, 양말 4쌍, 유아 폴더 매트, 작은 정사각형 이불, 뒤집기 방지 쿠션, 아기 띠, 딸랑이 두 개, 쪽쪽이 두 개.



흰둥이(찹쌀떡 군의 차) 가득 짐이 실렸다. 마치 휘청거릴 정도로 등에 봇짐을 맨 하얀 노새 같다. 태어난 지 113일 된 아기가 며칠 외박하기 위해선 세미 semi-이사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까짓 번거로움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에겐 예약된 이태원 해밀튼 호텔과 전시회, 후카 hookah 바, 곱창집이 있으니까.

철없는 엄마 아빠는 설렌 마음을 감추지 않으며 짐을 쌌음을 고백한다. 심지어 아빠는 아기를 데려다 놓으러 안산에 가는 길, 흥얼거리며 콧노래까지 불렀다고 한다.



집에서 찹쌀떡 군을 기다리는 동안 여유롭게 설거지를 하고 집 청소를 했다. 이렇게 눈치 안 보고 화장실을 가고 집안일을 한 게 얼마 만인가(‘집안일’을 맘 편히 하는 게 호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내친김에 뜨거운 물에 푸욱, 반신욕을 할까 하다가 그 기쁨은 내일로 미루기로 한다.

문득 말끔히 청소된 부엌과 거실을 보자 어딘가 휑한 기분이 든다. 저 어딘가에서 꼬물거려야 할 작은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아가의 짐이 빠진 공간은 황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가가 태어나기 전 원래 비어있던 자리였건만, 그 시간과 공간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졌나 보다. 아기의 물품을 정돈하다 찰떡이의 냄새를 맡는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다. 존재를 냄새로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 

한 시간도 안돼 아가의 안부가 벌써 궁금하다.

잘 가고 있겠지? 차 안에서 울지는 않을까 걱정이네.



순간 띠롱, 문자로 사진이 왔다.

화면 속 찰떡이는 안산 집 거실에서 귀여운 콧구멍을 힘껏 벌렁이며 울고 있다. 할머니 댁 냄새가 낯선 걸까(내 방식대로 생각한다), 왜 그러지. 마음이 좋지 않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지나 찹쌀떡 군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이야. 찰떡이가 너무 울어서 안 되겠어. ”



산타가 내 선물을 싣고 황망히 제 고향 핀란드 로바니에미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까치발을 들고 '내 선물은요?' 외쳐봐도 그는 가만히 손만 살랑살랑 흔들 뿐이다.   

한 시간 뒤 1과 1/2이 돌아왔다. 쌌던 짐을 그대로 옮겨 집에서 푼 뒤, 아가의 목욕 준비를 했다. 벌써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3시간 만에 돌아온 찰떡이는 무슨 무용담을 얘기하는지 재잘재잘 대다 방긋 웃기까지 한다. 울었던 흔적조차 없다.

허어, 요눔시키.



아가는 지금 쪽쪽이를 물고 내 품 안에서 조는 중이다. 단잠이 아닌 이유는 간간이 실눈을 뜨고 엄마의 부재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엄마 여기 있어. 괜찮아, 아가. 괜찮아.’

자그마한 등을 손으로 쓸어내리자니 아가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right here, right now.

더 작지도 크지도 않은 딱 지금의 찰떡이와 보내는 시간은 지금뿐이니까. 

일장춘몽, 아니 한바탕의 겨울 꿈이 지나간 자리에 일상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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