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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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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Aug 27. 2020

26시간 그리고 30분

틱톡 틱톡, 20191223




고백한다.

우린 둘만의 시간을 알뜰살뜰 즐겼다. 만 하루쯤 되는 시간이건만 한 달에 맞먹는 양의 기억을 남겼다. 어제 오후 세시쯤 집을 떠나 오늘 오후 다섯 시 반에 들어왔으니 26시간 하고도 30분의 데이트를 한 셈이다.



-두고두고 곱씹기 위해 그 사이 한 일을 적어둔다. 


1. 홍대 상상마당에서 한 '앨런 플레처 회고전'을 봤다.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인데 개인적으로 캘리그래피와 수채의 조화가 좋았다. 집에 잠들고 있는 만년필을 따뜻한 물에 녹여 깨워야겠단 생각이 번뜩. 이곳에서 사진 한 장은 건지자는 마음이었는지 온갖 엽기적인 포즈로 사진을 찍어댔다. 결국, 서로 놀릴만한 사진들이 가득 남았다.   



2. 예술창작센터가 개최한 예술 플리마켓을 구경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세상에는 역시 멋들어진 사람이 참 많다며 감탄했다. 2020년 목표는 멋진 사람 되기, 로 해야겠다.



3. ZARA가 하필이면(?) 정기 세일이라 각자 마음에 드는 옷 한 벌씩을 고르기로 했다. "난 옷 필요 없어. 구경 안 해도 돼."라고 하던 그는 잠시 뒤 "그럼, 보기만 할까?" 했다. 그리곤 곧 손에 두벌을 꼬옥 쥐고는 한 벌만 고르라는 내 말에 도리도리. 저 도리도리는 아가에게 배운 것일까.



4. 이태원의 상징(누구 맘대로), 해밀턴 호텔에 체크인했다. 잠시 짐을 두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 자유를 만끽. 숙면을 위한 1인 1 침대의 방이었다.



5. 주린 배를 채우러 하이에나처럼 싸돌아다녔다. 결국 선택한 것은 우설牛舌과 돼지갈비, 입가심으론 젤라토. 이천 쌀 아이스크림이 맛나긴 하지만 역시 젤라토는 이탈리아에서 먹은 게 최고다. 쫀득함과 달달함이 최상의 밸런스를 이루며 시소를 탔달까. 



6. 올댓 재즈 ALL THAT JAZZ에 웨이팅 리스트를 적고 오프 더 레코드 OFF THE RECORD에 가서 봄베이 진토닉, 그는 코로나를 시켰다. 마크 론슨의 Uptown funk를 가게 안 모두가 떼창 하는 가운데 문자가 띠링, 울린다. '입장해 주세요, 올댓 재즈' 주문한 지 5분도 안된 시간이었다. 우리의 동공은 떨렸고 난 테이블을 사수하기 위해 먼저 가게를 나섰다. 남은 술을 그가 처리하는 동안 외국인 서버가 찹쌀떡 군에게 물었다고 한다. 

"오우, 무쓴일, 이쒀요?"

차마 술이 아까워서 혼자 남은 거라고 그는 말하지 못한다.



7. 그는 올댓 재즈에 10분 뒤 도착한다. 볼에 홍조가 올랐다. 버번과 애플 사이다를 시키고 재즈에 마음을 맡긴다. '박선영 JR Combo'라는 팀이다. 재즈 기타 소리가 참 좋았고 베이스를 치는 분의 표정도 멋졌다. 그의 얼굴로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지 알 정도로 표현력이 뛰어났다.



8. 호텔에서 반신욕을 하고 잠을 청하는 동안 찹쌀떡 군은 비 오는 거리로 나가 케밥을 사 먹었다.



9. 8분 같은 8시간을 잤다.



10. 16분을 걸어 독일 빵집으로 유명한 더 베이커스 테이블 The bakers table에서 배를 채웠다. 난 버섯 수프와 주먹만 한 빵, 그는 웨지감자, 스크램블, 브라 버스트 소시지, 베이컨을 먹었다. 그의 브런치 메뉴가 얼마나 양이 많던지 독일 사람들은 참 아침부터 많이도 먹는구나, 했다.



11. 호텔로 돌아가는 길, 커다란 도토리 조형물에 매달렸다.



12. 조양 방직이란 히딱구리(특이)하고도 재밌는 카페에 갔다. 1933년부터 방직소로 운영되던 곳을 개조했는데 테이블이 경운기, 미싱, 트랙터였으며 의자 종류도 다양했다. 치과 의자, 이발소 의자, 그네. 사장의 취향은 100가지라 이거 저거 다 끌어다 모은 느낌이었다. '이 많은 오브젝트 중에 니 맘에 드는 거 하나는 있겠지.' 

커피의 맛은 평균 이하였으나 가격은 평균 이상인 곳이었다. 뭐, 이런 곳은 보는 재미에 가는 거니까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13. 조양 방직이니 실을 써야지 하는 마음에 자수를 놓았다. 나는 분명 백일홍을 놓았는데 완성하고 보니 산호초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나열하고도 한참이나 더 말하고픈 우리의 26.5 시간은 여러 사람 덕분에 만들어졌다.

우리의 부재에도 무탈히 지낸 찰떡이, 이제 막 네 달이 된 아가를 살뜰히 돌봐주신 시어머니, 그 곁에서 잘 지켜주시고 도와주신 시아버지. 물론 나와 함께 이 모든 시간을 보낸 그 역시. (감사합니다, 모두들)


적어 놓고 보니 다시금 머릿속에 불이 켜지듯 모든 기억이 환하게 빛난다. 겨울 다람쥐처럼 집안을 맴돌다 하루가 잿빛으로 느껴지거나 우울할 때, 손가락 까딱하기도 지칠 때 빛을 발할 기억들이다.

(보통은 아가의 잇몸웃음으로 가시기도 한다)



자아, 내일부턴 다시 시작이다.

26시간 하고도 30분의 일탈에서 돌아온 일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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