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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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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Aug 29. 2020

아기 통장

첫 통장, 20191224




아기 통장을 개설했다.

저금의 시작이자 출금의 원천지인 기본 입출금식 통장이다. 종이책 버전의 빨간 돼지 저금통인 셈이다.

경제관념을 벌써 심어주겠다는 의욕에 찬 오만은 아니다. 그저 나보다 한발 더 앞선 시작을 아윤이에게 주고 싶은 작은 바람이다.



며칠 전 은행에 전화해 필요한 서류를 물어보곤 주민센터에서 필요한 증빙서류를 뗐다. 대부분의 증명서는 기계에서 뽑으면 가격도 저렴하고(인터넷은 무료) 시간도 절약되지만 아기 관련 서류는 창구를 통해서만 발급이 가능하다. 아기를 많이 낳으라고 하면서 이런 데선 섬세함을 느낄 수 없다. 10센티도 안 되는 발로 아기가 직접 서류를 뗄 수는 없으니 어차피 부모가 사용할 거, 부모 이름 아래에 넣어 뽑을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아니면 이 관련 악용 범죄가 있는 걸까. 흠, 그럴 수도 있겠지.   



은행에 가기 전, 10년의 은행 경력을 지닌 자연 언니는 크리스마스이브의 은행은 분명 붐빌 것이라 했다. 연말이기도 하고 연휴 전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말, 연초의 은행은 어차피 늘 바쁠 테고 올해 꼭 아기 통장을 만들고 싶었기에 주저 없이 집을 나섰다. 통장 첫 장에 찍힐 날짜의 시작점을 찰떡이가 태어난 2019로 하고 싶었던 이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가 옳았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각 찾은 은행의 대기인원은 이미 22명. 잠시 갈등했지만 이미 은행에 도착했으니 되돌릴 수 없다. 일단 기다리자. 곧 대기인원은 36명으로 늘었다. 내심 아직 은행 창구를 찾는 이들이 많다니 하고 조금 놀랐다. 매번 ATM만을 왔다갔다한 나로서는 도떼기시장 같은 은행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게 당연한지도 몰라.

아무리 기계가 발달해도 남겨질 인간의 역할은 꽤 많을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내 순번을 기다리는 동안 아기는 칭얼댔고 배고파했고 졸려했다. 당연하다. 그 모든 것은 지당히 아기가 해야 할 하루의 일과다. 서두르지 않으려 애쓰며(요즈음 내 목표다) 아기를 안아 달래고 먹였다. 전광판의 번호를 수시로 확인하며 아기를 재우려는 동안 한 할머니가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음 도와줄게. 아기가 있을 땐 이런 사소한 도움도 크지."


사실이다. 아기를 돌볼 땐, 누군가의 시선마저도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아기 엄마, 아기는 되도록 안지 말고 눕혀서 재워. 엄마 몸 생각도 해야지. 내가 잘 알아. 손주가 일곱이거든."


덕분에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든다. 나도 누군가에게 작은 여유를 스리슬쩍 던져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닮고 싶은 마음을 만났다. 잘 보면 자세히 보면 어디서건 고마운 사람과 마음은 늘 있는 법이다. 할머니의 일곱 손주 이야기를 듣는 사이 찰떡이에겐 통장이 생겼다. 이 작은 통장을 위해 많이 걷고 많이도 기다렸다.



통장 앞표지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뽀로로 친구들이 해맑게 웃고 있다.

너희들은 찰떡이의 첫 친구들이구나. 이만 원이 든 뽀로로 통장을 잠자는 아가의 품에 안겨준다.

얘들아, 우리 찰떡이 잘 부탁해.

나 역시 찰떡이의 언젠가를 위해서 챙그랑, 챙그랑, 조금씩 쌓아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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