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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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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Aug 31. 2020

재잘재잘, 옹알옹알

20191228, 나의 재잘과 아가의 옹알




"이제 제법 사람다운 얼굴을 할 줄 아는구나."

"그렇지? 표정이 엄청 다양해졌어. 지금은 또 심각한 얼굴이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 사람 누구지? 아닐까."

"아니야, 뭔가 우리는 생각도 못 한 심오한 생각을 할지도 몰라."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우주의 원리 같은. 아님 생의 본질적인 질문 같은 거."



정말이다. 어쩌면 아기들은 어른의 예상보다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낼지 모른다. 점심, 저녁 메뉴로 상당 시간을 고심하는 엄마와 달리 되려 철학적인 질문으로 고 작고 귀여운 밤송이 같은 머리를 가득 채울지도 모르는 것이다.



얼마 전 다른 곳으로 이사 간 동네 언니(이사 갔더라도 한번 동네 언니는 영원한 동네 언니다)가 일을 마치고 잠시 우리 집에 들러 함께 저녁을 먹었다. 언니는 한 달 만에 본 아가의 표정이 다양해진 데다 나름의 자기표현을 하게 되었다며 신기해한다. 아기에게 한 달은 어른의 것과는 농도가 다른 거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찰떡이가 갑자기 뒤집기를 하려 안간힘을 쓴다. '나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하는 모양새다. 얼굴이 방울토마토처럼 빨개지더니 익룡 소리를 내며 용써보지만 활처럼 휘어진 자그마한 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괜찮아, 아가. 천천히 해."

붉게 익은 아가를 안아 살살 달랜다.



매 순간 애를 쓰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가와는 달리 사실 난 가끔 무중력 속에서 허우적댄다.

잘하고 있는지, 내가 고른 선택지가 맞는 건지도 알지 못한 채 도돌이표 일상을 반복한다. 침을 조르륵, 흘리며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아기를 보면 명치께 어딘가가 뭉근히 따뜻해지지만 그렇다고 빈병 같은 기분까지 녹일 수는 없다. 애초에 그 병은 녹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지친 마음을 기댈 누군가, 자질구레한 하소연을 들어줄 누군가, 이야기 나누며 함께 식사할 누군가를 만나면 조금씩 채워지고 비워질 뿐이다. 그러니 오늘처럼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우리 집을 찾아온 그녀나 내게 쉼터가 되어주는 자연 언니, 휴일에 피곤할 텐데도 먼길을 찾아오는 바비군, 가끔 카페 친구가 되어주는 진석 씨처럼 자기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 주는 이들이 참 고맙다. 

공허 따위 상관없이 좋은 이와의 대화는 언제고 즐거운 데다 날이 갈수록 사람과 시간이 귀한 법이니까.

(물론 가장 고마운 건 찹쌀떡 군이다. 매일같이 오매불망 기다린 그가 돌아오면 나와 아기는 잠시도 쉬지 않고 졸졸 쫓아다니며 한참 동안 재잘거린다. 아가는 옹알옹알, 엄마는 재잘재잘, 따로 또 같이 은근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화장실을 가면 화장실 앞에서, 식탁에 앉으면 그 맞은편에서, 침대에 누우면 함께 누워서 재잘재잘, 옹알옹알.)



그러고 보니 처음 아가가 내 눈을 맞추고 맞웃음 지었던 날이 생각난다. 그때의 기분은 그 어떤 단어나 표현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럴 때마다 나의 얕은 언어로 비칠 수 있는 감정에 한계를 느끼지만 어쩌랴. 세상 많은 것들처럼 그저 받아들이고 설명할 길 없는 그 감정을 잘 아껴둬야지. 흰 파도처럼 이는 물결에 전신을 빠트려야지.  다시 생각한다. 만약 지금의 웃음이나 표정의 단계를 넘어 아기가 말을 한다면 어떨까. 이 작은 1/2의 사람이 나에게 질문하고 내 물음에 답하며 소위 '대화'하는 그 어느 날, 언제일지 모르나 확실히 찾아올 그날엔 어떤 파도가 날 찾아올까. 잘은 모르겠지만 둘이서 혹은 우리가 만나는 보석 같은 이들과 함께 재잘재잘 거릴 것은 분명하겠지.



흠, 만약 이 귀염둥이가 정말 ‘우주의 원리’나 ‘생의 본질’ 같은 질문들을 쏟아 내면 어떡할까. 미리부터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이라도 들춰봐야 할까?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고 철학책이라도 뒤져야 하나.



'찰떡아, 이런 내 생각을 넌 어떻게 생각하니?'

넌지시 묻는 물음에 아가는 고개를 갸웃하다 헤헤, 웃는다. 근데 그 웃음이 참 맑고 인자하다. 

어쩌면 정말 아가는 심오한 이치를 깨달은 도사 인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는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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