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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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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Sep 01. 2020

자유 부인

몽글몽글, 20191229





'혼자 대구에서 며칠 쉬다 와.'


그는 가장 큰 선물인 시간을 선사했다. 육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챙기라는 자상한 의도다. 매일 하루 일과처럼 빌던 '세 시간만이라도 방해받지 않고 푹 자고 싶어.'라는 소원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다만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데굴거리며 침대에 웅크리는 것도 하나의 완벽한 겨울 휴가니까. 하지만 정작 짐을 싸다 보니 가벼운 몸으로 젖은 빨래마냥 늘어지겠다는 마음은 어디로 가고 커다란 트렁크에 짐이 가득 쌓였다. 옷이나 화장품이 아니다. 옷은 고작 두벌에 화장품은 작은 파우치 하나다. 그렇다면 도대체 28인치 대용량 캐리어엔 뭐가 있을까. 시간이 없어 미뤄두던 책들 중 엄선한 한 권, 자수할 거리들(실과 자수틀 etc), 드로잉 스케치북, (드로잉을 위한) 아이패드 프로, 노트북, 그리고 그리고. 

손에 쥔 것을 놓고 그저 드러누워 쉬는 시간이 내게 과연 주어질 것인가. 

 


대구 집에 도착해 캐리어의 짐들을 내 방에 모두 펼쳐 놓곤 거실에 나와 엄마와 '동물의 왕국'을 봤다. 사실은 티비보다 엄마 곁에 있고 싶은 딸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일단 티비 앞에 앉고 보니 점점 빠져든다. 티비의 매력을 사람의 것으로 비교하자면 매력이 철철 넘치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현란한 재주로 사람을 쏙 빼놓아 멍하게 만드는 서커스 형태일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화면의 재주에 빠져 멍하니 바라봤다. 

방송은 쇠똥구리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프리카에 사는 쇠똥구리는 겨울나기를 하기 위해 소똥을 경단처럼 굴려 저장한다. 그래야만 짝짓기도 할 수 있고 자손도 낳을 수 있다. 인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치열한 삶을 보던 중 이상한 포인트에서 찰떡이가 생각난다.

수컷 쇠똥구리끼리 싸우다 한 놈이 발랑, 넘어지는데 그러다 팔딱 일어서는 모습에서 아가가 떠오른다. 5cm의 뿔 달린 벌레를 보다가 아기를 떠올리는 것이 우습지만 요즘 뒤집기에 혈안이 된 찰떡이가 누워서 용쓰는 얼굴이 몽실 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기막힌 건 그다음이다. 쇠똥구리의 천적인 황소개구리가 나왔는데 이젠 그 개구리를 보는데도 찰떡이가 떠오르는 거다. 일 년 중 10달을 잠자는 황소개구리는 근육질인 데다 덩치가 아주 큰데 그 통통하고 튼실한 허벅지를 보니 찰떡이가 또다시 몽실 눈앞에 그려진다.


'허벅지랑 배가 엄청 오동통하네. 우리 찰떡이도 그런데.'  


세상 많고 많은 귀엽고 이쁜 것이 아닌 쇠똥구리랑 황소개구리를 보고 제 딸을 떠올리다니.

하지만 이미 떠올린 것을 어쩌나. 그 무엇을 봐도 아가가 생각난다는 말로 미화해야겠다.

길바닥의 작은 조약돌을 봐도 이내 아가의 꼬막손이 떠오르고 만다고.



서커스 상자에 빠져 선물 중 하루가 지났다.

트렁크의 짐은 여전히 방 한복판에 축제하듯 펼쳐져 있다. 드로잉이고 책이고 자수고 뭐고 손끝도 대지 않았다. 아마 올라가는 날까지 펜 한번, 바늘 한번 잡지 않을지도 모른다. 늘 육아 때문에 못한다고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선택에서 밀리거나 피곤에 밀리거나 서커스에 밀렸던 거지.  

세상 모든 A와 B 가운데 선택하는 기준은 호오, 아니면 아끼는 정도, 그것도 아니면 단순 변덕이니까. 



그리고 어쩌겠는가. 멀리 있어도 쇠똥구리나 황소개구리, 조약돌을 보고도 그만 아가를 떠올리게 되는데. 내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보살피는 게 최우선의 일과 아니겠는가. 이 밤의 한가운데에도 이렇게 아가의 방싯 웃는 얼굴이 몽글, 쪽쪽이를 물며 새근 자는 평온한 얼굴이 몽글대는데. 



'아가, 반나절만 떨어져 있어도 네가 아른대는구나. 얼른 올라갈게.

그때까지 너랑 나 둘 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자. 사랑한다,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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