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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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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Sep 20. 2020

홍양홍양

엄마의 생리, 20200117




임신 8개월 무렵, 

이미 두 아이의 엄마인 친구가 말했다. 


"그래도 부럽다. 생리도 안 하고. 

 난 오늘 이틀 짼데 아주 죽겠어."


부럽다는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점점 무거워지는 배의 압박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한 시간에도 몇 번씩 화장실을 가야 하는 데다 급격히 늘어난 몸무게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임산부의 처지가 부럽다니. 만삭이 돼서 힘든 점을 단숨에 열 가지라도 욀 수 있던 터라 매번 하던 그까짓 생리를 건너뛴다고 부럽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애초에 생리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탓이다. 하지만 역시 이상하다. 여자란 생물은 초중학교 무렵부터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생리와 이미 친근한 관계 아니던가. '홍양', '빨간 날'등의 별명을 붙여가며 그날을 기록할 정도로. 



물론 나 역시 월경전 증후군과 월경통이 심한 편이라 생리를 안 하는 게 편하긴 했다. 하지만 임신하고 겪은 갖가지 신체적 변화에 월경통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임신한 열 달 동안은 아기뿐만 아니라 수많은 걱정과 신체 변화를 모두 품고 있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그리고 또 하나 몰랐던 게 있다. 모유 수유를 끊으면 곧 생리가 시작한다는 것이다. 모유 양이 워낙 적은 편이라 끊었다고 표현하기 애매하지만 아기가 젖에서 입을 뗀 그 후, 약 2-3주쯤 뒤 생리가 터졌다. 누가 처음 이 동사를 썼을까. 아주 적절하다. 생리는 폭탄처럼 '터진다'. 눈물처럼 흘리거나 오줌처럼 누는 행위가 아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신체가 제 몸 안에서 자연 화산을 터트리는 현상에 가깝다. 

몸속에서 퍼엉, 하면 그 몸을 가진 자는 으윽-하고 쓰러지는.



이틀 전 생리가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몸이 나른하고 배가 살살 아프기에 예상하긴 했지만 붉은 피는 언제 봐도 익숙하지 않다. 그에 따른 바닥을 치는 우울과 무기력, 월경통도 물론이다. 생리 시기가 오면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우울이 끝을 달린다. '내가 왜 사나'따위의 질문과 눈물이 이유 없이 쏟아질 것 같은 순간이면 생각한다. 

'홍양이 오는구나.'



늦은 오후 빛에 면 생리대를 손빨래하다 친구가 부러워했던 기억이 났다. 그땐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는 나의 '혼자의 몸으로 생리 없음(엄밀히 말하면 배에 아기가 있지만)'을 부러워한 거다. 뱃속에 있는 아이를 기르는 것과 배 밖의 아이를 기르는 것은 천지차이인데 거기에 생리까지 겹치면 엄마의 예민함과 체력은 극과 극으로 치닫는다. 

만약, 그 아이 역시 생리를 하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잘은 몰라도 분명 아빠에겐 험난한 하루가 되겠지. 

미래의 찹쌀떡 군, 지금부터 응원을 보내. 생리에게 지면 안돼. 



월경은 사실 생리 현상의 하나일 뿐이지만 난 그 생리학적 작용 때문에 딸을 낳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번거로우며 찝찝한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배가 아파 방을 데굴데굴 구르고 젖어버린 속옷과 바지를 갈아입고 한 달에 한 번 붉은 우울과 마주치는 반복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생명을 배에 품기 위한 준비 기간 중 하나란 건 알지만 알게 뭐람, 당장 아프고 힘든 게 싫은데. 게다가 내 자궁은 아이를 품지 못할 수도 있는데, 정말이지 알게 뭐람. 



하지만 인생은 아이러니다. 

아기를 갖는 건 생각도 못 하던 내게 찰떡이가 찾아왔다. 

몇십 번의 생리를 지나 작은 생명이 내 자궁 속에서 움텄다. 한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몸이 고귀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진저리를 치던 생리마저 고마웠다. 월경이라는 과정이 없었다면 아기를 품는 일조차 불가능했을 테니까. 



아마 십여 년이 지나면 우리 찰떡이도 초경을 시작할 것이다. 그런 몸의 변화를 겁내거나 고민하지 않게 도와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다. 워낙 무뚝뚝하고 남매 먹여 살리기에 바빴던 나의 엄만 피가 난다는 말에 생리대 하나를 던져준 게 다였다. 왜 생리를 하는지는 고사하고 어떻게 사용하는지조차 몰라 한참을 생리대와 씨름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겪었던 당황스러움만은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도록 잘 설명해주고 축하해줘야지 마음먹는다. 

여자끼리 하는 말로 '생리는 질투가 많아 바로 따라 한다' 혹은 '생리는 옮는다'는 말이 있다. 나와 찰떡이의 홍양도 한집 아래서 너나들이할지 모를 일이다(내가 폐경이 오기 전까지). 

그럼 찹쌀떡 군은 우리에게 뜨거운 물을 넣은 물주머니와 꾸덕한 치즈케이크를 한 조각씩 건네주겠지?



물론 이제 갓 태어난 아가에겐 한참 먼 내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확실한 내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좋다. 생리 얘기하다 나온 결말치곤 어딘가 난데없지만 솔직한 마음이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확실한 내일을 꿈꿀 수 있는 나의 오늘이 나는 참 좋다. 

-다만 우리 아가의 월경엔 고통과 우울이 없길 조심스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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