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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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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Sep 21. 2020

아기는 엄마의 시간을 먹고 산다

무한대의 시간을, 20200117





일 년 만에 만난 친구와 '엄마의 시간과 인생'이라는 거창한 주제에 대해 서로의 별일 없는 일상을 나눴다. 대명사적인 역할에 비해 엄마의 하루는 사실 몇 개의 동사만으로 뚝딱 이뤄진다. '먹인다' '재운다' '논다' '지켜본다', 뭐 이런 사동사를 포함한 기본 동사들.



우린 같은 나이에 둘 다 딸을 가진 엄마지만 두 달 뒤 딸을 초등학교로 보내는 엄마와 태어난 지 사 개월 된 딸을 가진 엄마의 차이는 나이아가라 폭포(갑자기 웬)의 낙차만큼이나 크고 넓다. 외로움의 깊이, 체력의 한계, 몸과 마음의 여유 등 여러 면에서 그녀는 나보다 딱 7년 앞서있다. 

엄마 선배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 엄마 선배는 작년 이맘때쯤 제가 지나온 길에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나를 축하했다. 물론 놀리기도 했다.


"'내'가 사라지는 인생을 사는 경험을 하게 될 거야.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겠지. 우후후."


사실 많은 선배 엄마들이 한 얘기 중 대부분이 그거다. 내 인생인데 '내'가 사라지는 인생이라는 것(늙을 거야 우후후 파트 아닙니다). 모두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내려놓기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오래된 영화 제목이 생각난다.

'나 없는 내 인생'.

물론 그 영화 내용은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제목만 두고 봐선 아마 대부분의 아기 엄마가 외칠 것이다. 

어머, 이 영화 내 얘긴가!



또 다른 친구 역시 몇 년 전, 친한 찻집 사장님과 함께한 자리에서 고백한 적이 있다.


"아기를 사랑하는 건 분명한데, 내 인생이나 시간이 없는 거 같아. 요즘 어떤 영화가 개봉했는지, 어떤 카페가 예쁜지도 모르고 매일 부스스한 머리에 목 늘어난 티셔츠만 입고 살아. 핸드폰엔 죄다 아기 사진이야. 내 사진을 마지막으로 찍은 게 언젠지도 모르겠어. 지금으로선 찍고 싶지도 않지만. 그런데 무엇보다 내 시간이 없다는 게, 내 인생이 없다는 게 너무 슬퍼."


그녀가 아기를 낳은 지 일 년 남짓 지난 즈음이었다. 아기를 가지지 않았던 나로선 그저 묵묵히 듣는 게 최선의 다독임이라 생각했다. 아기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했다 한들, 상상과 현실은 다를 테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사장님이 입을 뗐다.


"그거라면 쉽게 해결이 가능하지."


응? 쉽게? 세상 모든 아기 엄마들이 고민하는 걸 그토록 쉽게 해결이 가능하다고? 귀를 쫑긋거렸다.


"아기와 함께 있는 시간도 '내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나 혼자서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내 시간이 아니라 아기와 사는 하루도 나의 하루고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아기의 시간과 엄마의 시간, 합집합 모두 내 시간이란 그의 설명이다. 나로선 '그게 뭐야'라는 반응이었지만 친구는 제법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기와의 시간을 제외한 여집합만이 '나를 위한 시간'이란 생각을 지우고 있었을까. 그녀는 통달한 도사 같은 사장님의 말에 '감사합니다. 그 말이 맞네요.' 하곤 활짝 웃어 보였다.



아기를 낳은 지금의 내가 그때를 다시 떠올려 본다.

친구의 말이 이젠 너무나 와 닿는다. 그리고 사장님의 뜬구름 같은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람은 제가 오롯이 겪어봐야 아는 법인가 보다. 세상에 100% 같은 상황이란 없지만 비슷한 입장이 되면 조금은 더 가까이 공감할 수 있다. 오늘의 내가 몇 년 전의 그 친구를 이제야 이해하고 '아기의 시간이 곧 내 시간'이라 여기는 마음을 긍정한다.



엄마도 엄마로서의 생이 처음이다. 그러니 엄마로서의 부담, 걱정이 가득한 것도 사실이고 외따로 아기를 돌봐야 하는 동안 외로운 것도 진실이다. 하지만 엄마는 아기가 성장하는 만큼, 아니 어쩌면 내면으론 그보다 더 훨씬 큰 성장을 한다. 엄마로서의 시간 자체가 주는 공짜 선물이 아니다. 그 시간 동안 노력하고 고민하고 애쓰는 사이 엄마는 성장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는 엄마로 새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 둘은 길고 긴 시간의 공간을 함께 쓴다. 제 뱃속에서 자신의 피로 아가를 길러낸 엄마는 또다시 제시간을 아기에게 먹이며 키운다. 그렇게 아가는 엄마의 시간을 먹고 산다.

사랑과 보살핌을 전제로 한 무한대의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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