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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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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Sep 22. 2020

BOOK LOVER

책을 좋아하는 방식에 대하여




난 책이 좋다. 

뭐든 좋아하는 데는 여러 방식이 있다.

책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 책을 들고 다니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 수면제 대신 책을 이용하는 사람, 책 이름 외우길 좋아하는 사람, 책에 둘러싸여 있길 좋아하는 사람, 책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 책으로 탑 쌓는 걸 좋아하는 사람,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곰곰이 생각한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책을 좋아하는 걸까?

집 앞 짧은 거릴 가더라도 늘 책 한 권을 챙기니 책을 들고 다니길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읽는 권수보다 많은 책을 사니 그저 책 사는 걸 좋아한다 말할 수도 있겠다. 아니, 도서관이나 서점에 빼곡히 꽂힌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격앙되니 책을 보는(읽는 것이 아니다) 것을 즐기는 사람일까? 우유부단하고 유야무야 한 나는 역시나 하나만 콕 집을 수가 없다. 어쩌면 방식 따위 상관없이 그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매일같이 책을 읽진 않지만(don't보다는 can't에 가깝다) 책은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웬만한 친구보다 스스럼없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데다 친우끼리만 가능하다는 '말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시간'을 꽤나 오래 지속한다. 

언제부터 책과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을까. 



동네 맘 카페에서 아기 책을 드림받았다. 

열 권 남짓 모두 때 타고 낡았지만 난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책의 가치는 청결이 결정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찹쌀떡 군은 못마땅한 눈치였다. 당연한 반응이다. 세상 가장 좋은 걸 제 자식에게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인데 꼬질꼬질한 책이라니, 그는 책이 담긴 종이봉투를 식탁 아래에 던져놨다. 



창을 타고 햇살이 넘어오는 따뜻한 오후, 

아가는 짧은 낮잠을 잤다. 

그 틈을 타 식탁 구석에 박혀있던 종이봉투에서 알록달록한 책을 꺼냈다. 지울 수 있는 얼룩은 지우자 싶어 마른 수건과 소독액으로 그림책을 모두 닦았다. 아무리 닦아도 오래된 시간은 벗겨낼 수 없다. 하지만 내용은 변하지 않는 데다 어차피 이 책들의 유효기간은 짧고 찰떡이가 좋아할지조차 아직 모르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성향의 반 이상은 이미 DNA에 적혀 있다는데 책에 대한 선호도나 취향도 그럴지 갑자기 궁금하다. 나는 왜 책을 좋아하게 되었더라.  



내가 책을 가까이하게 된 계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무료無聊, 즉 심심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살던 외할머니 집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 위 미지로 향하던 버스도 한 시간에 한두 대 뿐이었고 그 흔한 슈퍼조차 20분을 걸어가야 했다. 학교 주위에 응당 있는 도시의 문방구 대신 사슴 농장이 크게 자리했다. 

방대한 시간 속 유일하게 허락된 문명은 전기였고 창고로 쓰던 방 하나엔 책이 가득 쌓여있었다. 위인 전집을 비롯해 뜨개 하는 책, 중고등학교 교과서, 일본어로 된 책 등 장르 불문의 책더미였다. 결국 내 유일의 선택지는 그 더미와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오래된 책이 풍기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창고에서 새로운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그 시절을 살았다. 살아냈다. 



두 번째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엄마 남자 친구 때문이다. "니 마음은 어디에 있니?"란 쓸데없는(당시엔 그렇게 생각했다) 물음을 툭툭 자주 던지고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나와 동생을 데리고 자주 산과 바다를 데려가던 그는 책을 좋아, 아니 사랑했다. 지금은 없어진 대구의 본영당 서점이나 제일 서적을 생각하면 대부분 그와 함께였다. 돈이 넉넉지 않아 멋진 식사를 사주진 않았어도 늘 서점에서 "니가 읽고 싶은 책 다 사줄게. 가지고 와봐."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에도 그는 늘 책을 읽고 무언갈 끄적였기 때문에 조용한 그 시간, 나와 동생도 자연스레 책을 들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인지 모른다. 내가 서점과 책을 제대로 좋아하게 된 건(그는 지금 결국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장오 아저씨, 항상 행복하세요). 

과연 나는 찰떡이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요즘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책장의 위치다. 거실에 떡하니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티비를 살짝 옮기고 책장을 한두 개 두고 싶은 마음이다. 자주 접하고 봐야 잘 알 수 있는 법. 게다가 취향은 호기심과 관심, 경험에서 나온다. 당장은 아가가 너무 어리니 책으로 탑을 쌓던 빼내면서 노는 장난감으로라도 가까이하면 좋을 것 같다. 아기가 조금 더 크기 전 이리저리 거실의 구도를 잡아 볼 일이다. 정리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이에게 조언을 구해도 좋다.

뭐 그래 봤자 작은 거실에 책장 한두 개 두는 일일 뿐이지만 나비의 날갯짓이 책 폭풍을 부른다는 말도 있지 않나(그런 말 없습니다). 



좋아하는 걸 공유하고픈 마음은 엄마도 별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란 하나의 세계를 딸에게 소개해주고 함께 그 속에서 유영하고 싶다.

아가는 서너 살 무렵이 된 제 손을 잡고 어린이 도서관에 가는 게 나의 작은 희망이란 걸 알까.

언젠가 같은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말하고 듣고 싶어 한단 걸 요 작은 아기는 꿈에도 모를 거야.



마른 수건과 소독액으로 아가의 동화책을 닦으며 다시 한번 생각한다. 

우리 아가는 책을 좋아하게 될까? 

어떤 방식으로 책을 좋아할까? 

아직은 너무나 작고 어려 글씨는커녕 그림의 형태도 잘 모를 아기에게 알록달록한 색이라도 보여주고 싶어 그렇게도 낡은 책을 박박 씻어낸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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